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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옥새3] 조선 찾아온 40대 백인 여성의 정체는

[황제의 옥새3] 조선 찾아온 40대 백인 여성의 정체는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19-07-04 12:05
업데이트 2019-07-0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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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발굴 미국 첩보소설 ‘황제의 옥새’ 3회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100주년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
경성역(서울역)이 지어지기 전 기차역으로 쓰인 남대문정거장(남대문역). 과거 이 지역을 숭례문 또는 남대문 밖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됐다. 1919년 서대문역이 폐지되면서 남대문역은 서울의 중앙역으로 자리잡았다. 1923년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25년 새 역사도 준공됐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경성역(서울역)이 지어지기 전 기차역으로 쓰인 남대문정거장(남대문역). 과거 이 지역을 숭례문 또는 남대문 밖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됐다. 1919년 서대문역이 폐지되면서 남대문역은 서울의 중앙역으로 자리잡았다. 1923년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25년 새 역사도 준공됐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제물포항에서 기차(1900년 개통된 경인선)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가 남대문정거장(남대문역)에 들어섰다. 한 여성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백인이었다. 이 불안한 곳에 혼자서 여행하려고 오다니. 내 마음 속에서 신사도 정신이 피어 올랐다. 그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플랫폼에서 내려 오지 않고 그녀가 짐꾼, 인력거꾼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살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짐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삮꾼들이 이 영국인 여행자에게서 서로 짐을 가져가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듯 했다. 이때 내가 개입했다. 일꾼들을 제지하고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이 낯선 동북아시아 한 가운데서 나같은 백인 남자를 만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보자 어찌나 반가웠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껑충 껑충 뛰었다. 나는 통역인 겸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걸었다. 약간 기묘한 느낌을 풍기는 한마리 새 같았다. 금발에 간간히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흰색 말에 회색 줄무늬를 넣은 듯 했다. 초췌한 얼굴에 흰색 도료를 바른 것처럼 웃을 때마다 화장이 갈라졌다. 다소 넓게 퍼진 입술에는 간단히 립스틱을 발랐다. 다만 짙게 분칠한 얼굴과 달리 보라색 눈빛만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밝게 빛났다. 비극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젊음을 잃어 버린 여인 같다고나 할까. 아직 남아있던 젊음의 매력이 눈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세 주역. 1907년 6-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밀사로 파견한 이준(왼쪽부터).이상설.이위종. 서울신문 DB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세 주역. 1907년 6-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밀사로 파견한 이준(왼쪽부터).이상설.이위종.
서울신문 DB
그녀는 11월에 피어난 마지막 과꽃 같았다. 다가오는 겨울을 앞두고 줄기는 시들었지만 꽃 속 두 개의 보라색 점만큼은 별처럼 반짝였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녀는 남성들이 입는 여행용 코트 같은 플라운스 스커트를 입었고 척탄병(수류탄을 던지는 병사)이 입는 낡은 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도요새의 날개처럼 거친 재료로 만든 스코틀랜드 모자도 쓰고 있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영국인 전사들의 그림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그녀는 젊을 때부터 남자에게 한번도 기대본 적이 없거나 자신의 의지를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급진적 여성단체 회원 같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우간다(당시 영국의 식민지) 소요 사태에 헌신하거나 네팔의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전파하는 일도 잘 할 듯 싶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는 영국인 여성들은 자국보다는 극동 지역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이 40대의 고상한 영국 여인에게 마차를 함께 타자고 권했다.
3·1운동 당시 제물포항의 모습. 제물포항은 이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국가기록원 제공
3·1운동 당시 제물포항의 모습. 제물포항은 이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국가기록원 제공
”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녀는 영국 특유의 높은 톤의 갈라진 어조로 말했다.

“서울은 새로온 외국인을 환영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네요. 삯꾼들이 서로들 내 짐을 가져가려고 하는 걸 보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이제 긴장을 풀라고 말하며 내 손을 뻗었다. 우연히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손등에 닿았다. 만약 그녀가 이상한 화장으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았다면 이 느낌은 나에게 더 큰 떨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황제의 옥새’는 4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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