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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통탄할 증권가 보고서…외국어 남발

세종대왕이 통탄할 증권가 보고서…외국어 남발

입력 2011-10-07 00:00
업데이트 2011-10-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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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한글 대체 가능…”사용자 의식 개혁이 중요”

국내 증권사들이 주식 투자자를 대상으로 쏟아내는 경제, 산업, 기업 관련 보고서는 하루에 수백 건이 넘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보고서가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의미를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외국어를 한글로 대체할 수 있는데도 어려운 영어를 고집하는 관행을 바꾸려면 보고서 작성 주체인 증권사 연구원들의 개선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국적 불명 보고서에 투자자 ‘분통’

”대형 건설업체가 밸류에이션 디레이팅(valuation De-rating) 국면으로 진입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바텀(bottom)에서의 실적, 매크로(macro)에서의 이슈(issue) 두 가지다”

최근 한 증권사가 낸 건설업종 보고서 중 일부 문장이다. 용어 대부분이 영어 표현이어서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사람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다른 증시 전문가에게 이 문장을 우리 말로 순화하도록 부탁했다. 그랬더니 “대형 건설업체의 가치가 낮게 재조정되는 국면으로 진입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기업 이익과 거시경제 쟁점 등 두 가지다”로 바뀌었다.

주식투자 초보자라도 금방 알 수 있는 문장이 된 것이다.

건설업종 지수가 16% 하락하면서 6% 하락한 코스피 대비 10%포인트 언더퍼폼했다”, “3분기 실적은 시장 컨센서스를 충족할 전망이다”, “그리스 정부부채에서 민간 부문 익스포저는 약 2천672억 유로로 추정된다” 등 문장에도 난해한 영어가 포함됐다.

해당 문장의 언더퍼폼은 ‘수익률 하회’, 시장 컨센서스는 ‘시장 예상(전망)치’, 익스포저는 ‘위험 노출액’으로 각각 풀 수 있다.

우리말로 바꿨을 때 이해가 훨씬 쉬운데도, 증권가 보고서에는 무수한 외국어가 관행상 남용되고 있다.

어닝시즌(실적 발표기간), 어닝서프라이즈(실적 급등, 깜짝 실적), 마진(이윤), 모멘텀(성장동력, 계기), 가이던스(회사측 전망치), 펀더멘털(기초여건), 리스크(위험, 위험 요소), 스몰캡(중소형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주가순자산비율(PBR), 주가수익비율(PER), 주당순이익(EPS) 등 전문용어도 한글풀이가 없어 주식 투자 초보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회사원 김경환(34)씨는 7일 “전문용어를 쓰다 보니 쉽게 한글로 표현이 안 되는 것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 남발한다는 느낌이 든다. 안 되는 것은 놔두더라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조정하는 것이 가독성을 높일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가 외국어 대부분 한글 대체 가능

증권사 연구원들이 외국어를 많이 쓰는 것은 영어 단어에 담긴 고유한 의미를 한국어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설문조사 참가자의 절반 이상(28명, 50.9%)이 외국어 사용 이유로 ‘한글로는 정확한 의미를 살릴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증권사 연구원은 “처음 보는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외국어 중에는 업계에서 이미 고유 명사화돼 있는 용어들이 많다. 주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를 대상으로 영업하는데 영어를 쓸 때 인지가 더 빠르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밸류에이션’과 같은 전문용어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국립국어원에서 권유하는 ‘평가가치 매력이 높다’나 ‘평가가치가 싸다’는 표현보다 ‘밸류에이션 매력이 높다’라고 할 때 의미전달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응주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밸류에이션이라고 하면 주가수익비율이나 주가순자산비율 등의 투자지표를 활용해 좀 더 과학적으로 평가했다는 의미까지 담을 수 있어 자주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증권사 연구원들이 남용하는 외국어는 한글로 바꿔도 의미 전달에 무리가 없는 표현들이 대부분이다. 보고서 표현 방식을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습관상 외국어를 고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세중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은 “이제까지 썼는데 굳이 왜 바꾸느냐는 심리가 큰 것 같다. 제재가 어려우니 사용자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하다.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는 태도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외국어 사용 습관을 전반적으로 바꾸기 어렵다면 최소한 전문용어나 외국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배려라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박희운 KT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신문 기사 끝에 전문용어의 설명을 다는 것처럼 보고서도 뒷면에서 외래어와 전문용어를 풀어주면 투자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좀 더 친절한 보고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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