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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오글 교수와의 추억/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매체경영 교수

[시론] 오글 교수와의 추억/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매체경영 교수

입력 2011-04-29 00:00
업데이트 2011-04-2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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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매체경영 교수
김동률 서강대 매체경영 교수
내연구실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한 외국인 노부부와 우리 가족이 함께한 모습이다. 주인공은 나의 학위 공부를 도와준 교수 중 한 분이다. 십여 년 전 방한 당시 우리 가족과 함께 한 저녁 자리에서 찍었다. 노 교수는 당시 미국 조지아주 에모리 대학 오글 교수였다. 이쯤 되면 ‘아’ 하고 고개를 끄떡이는 사람들이 꽤 있겠다.

많은 한국인에게 오글 교수는 낯익은 인물이다. 특히 이 땅의 민주화 과정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 본 기성 세대에게 그는 잊혀지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실 오글 교수보다는 오글 목사로 더 알려진 그는 이 땅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최근 무죄로 판결 난 74년 인혁당 사건 고문 조작설을 처음 제기했다가 강제 추방당한 바 있다. 비록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나는 그가 이 땅의 빈한한 자들에게 바친 희생에 감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서울에서 가장 근사한 레스토랑에 내외분을 모셔 저녁을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오글 교수는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단둘이서 인천시 변두리에 자리를 잡고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이른바 도시산업 선교회의 출발이 된다. 권위주의 시대, 도시산업 선교회는 기업의 ‘도산’을 가져 오는 교회로 기업인들에게는 각인됐지만, 민주화 주역들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서울대 강단에도 잠시 섰다.

나는 그와 곧잘 논쟁을 벌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재벌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에 맞서 한국적인 상황 논리를 주장하며 이해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나는 그런 그의 시각을 고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늘 나의 입만 아플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십년 전 우리 가족과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 처음으로 삼성·현대 등 한국의 재벌에 대해 상당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몸 바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 국가로 위치를 굳힌 이면에는 재벌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천 변두리 ‘푸세’식 화장실의 추억 등등을 회고하며 당신의 가족들이 한국에 쏟아부은 애정이 마침내 민주화와 경제성장으로 결실을 본 데 대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격했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은 이제 이웃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노동자들의 권리 또한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로 강화됐다. 오글 교수가 본다면 상전벽해를 느낄 만큼 모든 것은 변했다. 그래서 재벌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도 지금쯤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토록 오글 교수에 맞서 재벌을 변호하던 내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과이익 공유제에 대한 재벌의 거친 반격은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몽땅 몰아주고 천문학적인 고배당을 챙기는 재벌의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부품 업체를 쥐어짜고, 광고마저도 계열 광고사에 맡기고, 한마디로 땅 짚고 재산 불리기일 뿐이다. 현 정부가 총액출자제한제도, 중소기업 고유업종 등 재벌들을 묶어 놓았던 여러 규제를 ‘친(親)기업’을 앞세워 대폭 풀어 준 다음에 벌어진 현상이다. 심지어 삼성·LG·SK 등은 문방구류 같은 소모성 자재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 중이다. 중소 문방구 제조업체들이 단번에 몰락했다.

고언하건대 한국의 재벌에게 초과이익 공유를 요구하는 것은 반시장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재벌의 성공 뒤에는 열악했던 노동조건 속에서도 구로공단과 중동 열사에서 흘린 한국인의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방한한 억만장자 워런 버핏이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과 파는 노점상쯤 돼 있을 것”이라고. 미국과 미국인이 자신의 부를 이루게 해 줬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부의 대부분을 미국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버핏의 말씀, 한국의 재벌이 반만이라도 들어주면 좋겠다.
2011-04-2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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