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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리커창의 연쇄 방문/최용규 논설위원

[씨줄날줄] 리커창의 연쇄 방문/최용규 논설위원

입력 2011-10-21 00:00
업데이트 2011-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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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리에 불과한 리펑싼(李奉三)의 아들은 더없이 총명했고, 어렸을 때부터 공부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74년 당시 19세이던 리펑싼의 아들은 중국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촌에 하방(下放)돼 5년간 고된 농사일을 했다. 한 농민은 훗날 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대단히 총명했고 장난을 치는 일이 없었다. 일도 열심히 해 점심시간에 30분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청년은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하방된 안후이성(安徽省) 펑양현 둥링촌을 떠날 때까지 노동시간 말고는 죽도록 책만 팠다. 그는 2012년 10월 제18차 당대회에서 최고지도자 자리를 놓고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숙명의 대결을 펼칠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다.

리커창의 베이징대 친구들은 그를 ‘뛰어난 수재’이자 ‘야심가’로 평가한다. 하버드대 유학을 포기하고 중국 내에서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는 쪽을 택했다.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자신의 재능을 전면에 내세워 능력을 과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찬사와 비판이 교차한다. 리커창을 출세가도로 이끈 인물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다. 리커창은 후진타오가 ‘품은 칼’로 묘사되기도 한다. 후와 리는 1980년대 초 인재의 보고로 여겨지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리커창은 후진타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엘리트의 길을 걸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혔던 리키창은 2007년 제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서열 7위가 되면서 6위인 시진핑에게 밀렸다. 시진핑 뒤에는 상하이방을 호령하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있었다. 시진핑과 리커창의 레이스 이면에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투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서전은 장쩌민의 승리다.

리커창이 이달 말 남북한을 연쇄 방문한다. 중국 외교부 장위(姜瑜) 대변인은 “리 부총리가 해당국 영도자들과 회담을 하고 국제문제 등의 공통 관심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총리나 부총리는 주로 ‘안방마님’ 역할을 한다. 리커창이 부총리 취임 후 맡은 일도 행정개혁, 경제정책, 의료개혁 등 국내 문제였다. 그런 그가 안방을 벗어나 곧 외유에 나선다. 그것도 중국에 가장 중요한 국가인 남북한이다. 앞서 시진핑은 2008년 6월 외교무대에 데뷔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상대였다. 1년 앞으로 다가온 차기 지도자 자리를 놓고 리커창의 역전이 가능할까?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2011-10-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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