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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窓] 비움, 아름다운 채움/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생명의 窓] 비움, 아름다운 채움/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입력 2012-08-11 00:00
업데이트 2012-08-1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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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거닐면서 풀잎들이 참 신선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풀잎들이 눈에 들어와 마음을 흔든 것이다. 이 새로운 발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게 묻는다. 왜 여태까지는 풀잎의 신선함과 어여쁨을 몰랐던가. 무관심했던 것인가. 아니면 비교 우위에 젖어 있던 것인가. 둘 다다. 꽃과 함께 있을 때 사실 풀잎은 보이지 않았다. 꽃이 더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꽃을 향해 쏠리던 그 눈빛과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그 어여쁨 앞에서의 탄성까지도. 그 곁의 풀잎은 전혀 나의 눈길을 받지 못했다. 풀잎의 그 외로움까지도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풀잎은 내 눈길 밖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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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풀잎이 꽃처럼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풀잎에게 사과했다. 꽃만 예뻐하던 나의 이 삿된 고정관념을 용서해 달라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시선으로 너를 외면했던 나의 무관심의 폭력을 이해해 달라고. 풀잎이 꽃보다 못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는 풀잎을 새롭게 보면서 알게 되었다. 꽃이 눈에 띄는 어여쁨을 가지고 있다면 풀잎은 마음을 푸르게 물들이는 은은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꽃과 풀잎의 다른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풀잎의 매력을 발견하면서부터 산은 온통 풀이라는 꽃의 동산이 되었다. 꽃이 지고 없어도 풀잎들은 여전히 푸르게 남아 이 산이 또 다른 꽃들의 세상임을 알게 한다. 꽃이 지고 없어도 이제 산은 더 이상 볼품없는 산이 아니다. 그것은 꽃이 피었을 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모습으로 산을 장식한다. 풀 냄새와 그 수덕한 모습이 꽃들의 자리를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꽃만이 예쁘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서부터 나는 아주 넉넉해졌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자리가 커졌고 고정관념이 얼마나 나를 구속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풀잎을 외면했듯이 풀잎 또한 나를 외면했던 것이다. 고정관념은 결국 개별성을 강화하고 상호 연관성이라는 생명 세계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조주 선사는 당신을 찾아와 도를 묻는 사람들에게 차나 마시라고 했다. 차나 마시라는 조주의 답이 지닌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조주가 내놓은 답의 의미는 마시는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찻잔에 있는 것은 아닐까. 도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비우면 도는 스스로 찾아온다는 것이 조주 답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풀잎이 예뻐 보이는 순간 나는 산길에 서서 조주의 차를 마시고 그 비워진 잔을 보았던 것이다. 그 비워진 잔에 담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고정관념이라는 찻물을 비우고 버려졌던 풀잎의 아름다움을 그 잔 속에 담았다. 이것은 내게 작은 깨달음이었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기쁨에 눈뜨게 하기 때문이다. 비우지 않으면 새로워질 수 없고 또한 즐거움을 만날 수도 없다. 날마다 새날을 만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비운 사람이다. 마음속에 자리한 탐욕을 비우면 그 자리에는 자비가 채워지고, 분노를 비우면 그 자리에는 사랑이 찾아오게 된다. 다시 우리들 마음속의 사념을 비우게 되면 그 자리에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

나는 산길을 걸으며 비움이 아름다운 채움이라는 깨달음 하나를 만났다. 마음을 비우면 이렇게 멋진 깨달음의 새벽이 찾아오는 것을 왜 몰랐던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고정관념으로 형성된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들의 삶에는 여유가 없었고 배려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좁고 옹색하게 만드는 일인가. 진정 자기만 위한다고 사는 일이 가장 자신을 해치는 일이 되고야 마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풀잎이 꽃처럼 예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내게 있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했다. 그 비워진 자리를 풀들이 다가와 푸른 아름다움으로 채워 주었다. 이 비움과 채움의 아름다운 진행이 내게 날마다 새날을 보여 준다.

2012-08-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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