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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窓] 살, 금욕과 사랑 사이/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강사

[생명의 窓] 살, 금욕과 사랑 사이/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강사

입력 2013-07-27 00:00
업데이트 2013-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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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정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구미정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며칠째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 동선이 제한되다 보니 만만한 게 컴퓨터다. 오늘도 글을 쓴답시고 종일 컴퓨터만 두드려댔다. 아니다. 실은 글을 쓰는 틈틈이 ‘인터넷질’도 뻔질나게 했다. 한데 인터넷이라는 요망한 세상 속을 빛의 속도로 헤집고 다니는 동안, 아무하고도 ‘살’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기이하게 여겨진다. 분명 그 안에서 무수한 인연들과 부닥치고, 또 익명의 다중이 공들여 집적해 놓은 정보를 공짜로 얻기까지 했는데, ‘살’은커녕 ‘말’도 닿지 않았다. 이런 무례한!

인간의 무수한 관계 가운데 머리로만 맺어지는 관계만큼 공허한 게 또 있을까. 생각으로는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 수백 명쯤 거뜬히 살리고도 남는다. 그뿐이랴? 말로도, 그래야 한다고, 그럴 거라고 수없이 사기를 치고 위선을 떨 수 있다. 문제는 살이다. 다만 손끝이라도, 살과 살이 맞닿아야 진짜다. 생각과 말에는 뼈만 있는 게 아니다. 살도 있다. 살이 붙어야 비로소 생각은 현실이 되고, 말은 실천이 된다. 살은 없고 뼈만 있으면 생각은 독선이 되고, 말은 폭력이 되기 쉽다. 그러니 생각과 말의 구원 능력은 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만 두드린 내 손은 철저히 금욕적이었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최근에 등장한 컴퓨터가 ‘호모 사피엔스’의 자리를 순식간에 대체한 이래, 어느 종교보다도 강력한 금욕주의를 창안했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컴퓨터는 살이 닿는 모든 관계를 프로그램화해 인터넷 속의 가상 관계로 전환시키고, 인스턴트식 편리성에 중독되게 만든다. 하여 컴퓨터가 ‘전지전능’해질수록 우리의 살은 더욱 인간성을 상실할 것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살과 살의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억누르는 금욕주의는 애당초 탈선과 타락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수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준 뜻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는 머리와 입으로만 사랑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몸을 입은 것이었고, 몸을 바친 것이었다. 그가 화병에 시달리던 베드로의 장모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이미 죽었다고 선언된 야이로의 딸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만짐’의 의미가 아니었다.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상 병에 걸린 부정한 몸 또는 부정의 극치인 시신을 접촉하는 행위는 상대방의 부정이 옮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살을 나누는 사랑에는 서로의 운명에 참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다 못해 봄에 살을 섞어 가을에 열매를 맺는 나무들도 목숨 바쳐 제 사랑에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가. 여름은 무엇보다도 금욕주의가 해체되는 계절이다. 노동의 금욕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가장 능동적으로 살을 섞는 시기다. 도시 문명은 ‘바캉스’라는 이름으로 이를 제도화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간성이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걸 조금이나마 깨달은 탓이다. 한데 자연은 오래전부터 문명의 부정을 제 몸으로 옮겨 인간 대신 십자가를 지고 있건만, 인간은 어떤가. 쓰고 버리는 관성에 찌든 나머지, 자연은 고사하고 다른 사람의 몸에다가도 못된 짓만 하는 건 아닌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한 가지 관계 속에 열 가지 관계가 들어 있다. 아무리 사소한 관계라도 근신하며 정성을 쏟는 것, 그것이 깨어 있는 인간의 삶이다. 그러니 설령 산을 오르더라도 침조차 함부로 뱉지 말 것. 초록의 나무들이 지금 열렬히 사랑하고 있나니.

2013-07-2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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