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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수능도 할 말이 있다/이기철 사회부 차장

[데스크 시각] 수능도 할 말이 있다/이기철 사회부 차장

입력 2015-03-26 17:56
업데이트 2015-03-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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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일 얻어터지는 나는 교육에서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다. 1994년 태어날 때의 원래 내 모습은 사라지고 땜질식 성형에 누더기가 됐다. 나는 쉬우면 ‘물수능’이라고, 어려우면 ‘불수능’이라고 얻어맞는다. EBS 문제를 그대로 베낀다는 오명도 듣는다. 그래도 난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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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사회부 차장
이기철 사회부 차장
며칠 전 일이다. 지난해 수학 B형에서 만점자가 6630명이 나와 물러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를 손질하겠다는 개선위원회가 올해부터 변별력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시안을 발표했다. 변별력이라는 말에 입시 업체들은 내가 까다로울 것이라며 수험생들을 위협했다. 변별력은 ‘인 서울’을 노리는 학생을 위한 것일 뿐 수험생 95% 이상은 아무리 내가 물이라도 어렵게 느낀다. 사교육비가 오를 것을 우려한 청와대는 교육부를 질책했다. 결국 교육부는 사흘 만에 지난해와 같은 출제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뒤집었다.

사실 나도 내가 헷갈릴 정도로 자주 바뀐다. 올 11월 수험생은 지난해와 같은 형태의 나를 만난다. 하지만 내년에 나를 마주할 수험생은 한국사를 필수적으로 치러야 한다. 현재 고교 2학년생에겐 공부할 과목이 하나 더 늘었다. 또 A, B형으로 나뉘었던 국어는 하나로 통합됐다. 수준별로 선택하던 수학은 문과와 이과 계열별로 치른다. 올해의 나와 내년의 내가 같은 시험일까 하는 정체성마저 혼란스럽다.

현재 고교 1학년이 치를 2018학년도에는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다. 하지만 절대평가 등급은 결정되지 않았다. 이를 여태 결정하지 않은 것은 사실상 나의 제도 변화 ‘3년 예고제’를 어긴 것이고, 절대평가를 세밀한 준비 없이 결정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내가 바뀌지 말아야 할 고정불변의 절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정 역시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가야 하며, 학생을 평가하는 제도가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교육적 필요가 아니라 정치권이나 청와대 입김 때문에 내가 바뀌기에 역풍을 맞는 것이다. 나를 바꾸려면 예고 기간을 대통령 임기보다 더 길게 잡아서 정치적 타산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3년의 예고 기간은 적응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학교 현장에서는 아우성이다.

또 내가 EBS에 너무 의존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이는 사교육에 접근하기 좋은 이들의 억지 논리라고 치부한다. 입시 학원 하나 없는 농어촌 학생은 어떻게 나를 준비하라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이참에 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대입 선발 방식도 도마에 올리는 게 합당하다. 당장 다음달이면 일부 고교는 중학교 3학년생을 대상으로 원서 접수를 하는 등 선발 절차를 시작한다. 반면 아직 전형 절차를 확정하지 못한 대학도 수두룩하다. 대학은 언제까지 나에게 무임승차할 것인가. 내가 학생을 성적으로 줄 세우면 서열화된 대학은 학생을 차례로 집어 가는 식이다.

내 나이 22살이지만 23번 시험이 치러졌다. 시험이 그동안 전년도와 같이 치러진 것은 네 번뿐이다. ‘범교과적 사고력 측정’을 하겠다고 도입한 첫해와 비교하면 바뀌지 않은 것은 이름뿐이다. 입시 업체들은 나를 속속들이 분석했고, 나의 한 발은 EBS에 걸려 있다. 문항은 사실상 다 노출됐다.

교과 과정이 바뀌지 않는 한 문항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수명이 다 됐다는 방증이다. 나는 이젠 역사 속으로 들어가 쉬고 싶다. 그러나 내 후손은 급조하지 말자.

chuli@seoul.co.kr
2015-03-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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