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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비문의 시대/김승훈 경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비문의 시대/김승훈 경제부 차장

김승훈 기자
입력 2020-11-12 17:54
업데이트 2020-11-1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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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훈 정치부 차장
김승훈 정치부 차장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나훈아씨가 지난 추석 연휴 첫날 한 방송사 공연에서 한 말이다. 방송을 본 이들은 열광했다. 가슴을 뻥 뚫어 주는 속 시원한 말을 했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정치권도 출렁였다. 야당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소신 발언이라고 치켜세웠고, 여당은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맞받았다. 20년 넘게 말과 글을 다뤄 온 사람으로, 이 말을 언론을 통해 처음 접했을 때 ‘어,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위정자(爲政者)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이 의미를 대입하면, 국민이 힘이 있으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가 없다가 된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나훈아씨는 위정자의 ‘위’자에 나쁜 의미를 담아 말한 것 같다. 식자들은 위자를 ‘할 위’(爲)가 아니라 ‘거짓 위’(僞)로 대체, 거짓과 위선으로 정치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말이 안 되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니, 글자를 바꿔치기해 없는 단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희한하게도 나훈아씨의 말이 문맥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말이 의미를 전달하는 말이 되려면 간단하다. 위정자 앞에 ‘나쁜’을 넣으면 된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나쁜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다.’

조정래 작가도 뜻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했다. 지난달 50주년 기자간담회에서다. 조 작가는 그날 한 기자의 질문에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립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국내 일본 유학파는 죄다 친일파라는 말인가. 그는 논란이 일자 “‘토착왜구’라고 하는 주어부를 빼지 않고 그대로 뒀다면 이 문장을 그렇게 오해할 이유가 없고 국어 공부한 사람은 다 알아듣는 이야기”라고 강변했다. 일부 언론이 ‘토착왜구라고 부르는’이라는 주어부를 빼고, 뒷말만 써서 왜곡했다는 취지다.

앞서 인용한 말은 조 작가가 현장에서 말한 원문이다. 주어부가 살아 있는데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50년간 말과 글을 전문적으로 다루며 연구해 온 대작가가 내놓은 해명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주어부를 살려도 문맥이 맞지 않는, 딴 세상 말이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표현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으면 됐을 텐데, 문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괴이한 변명을 늘어놨다.

최근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이문열 작가는 지금 이 시대를 ‘말이 망해버린 시대’라고 규정했다. 말의 맥락과 의미가 뒤엉켜 버린 세상이 돼 말의 효과와 가치가 사라진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 난무하고, 말이 안 되는 말을 내 입맛에 맞게 덧칠하거나 말이 된다고 빡빡 우길 때 망한다.

나훈아씨와 조정래 작가는 일례일 뿐이다. 사회 곳곳에서 네 편, 내 편으로 나뉘어 말에 색깔을 덧씌워 곡해하고, 빨간 것을 파랗다고 사생결단식으로 우기는 게 일상이 됐다. 인터넷 공간은 참담하다 못해 처절할 정도다.

정치권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말을 망하게 한 진원지인 정치판의 추태를 들추면 차라리 실어증이 낫다는 생각이 휘몰아칠 것 같아서다. 말을 망하게 해 놓고선 망하게 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을 한들 통할 리도 없다.

사람들은 말을 갈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게 위안이나 기쁨을 주거나 나를 대변해 주는 말을 원한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간절히 바라기에, 말을 자기 희망대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말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비문(非文)을 아무렇게나 쏟아내선 안 되는 이유다.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명심했으면 한다.

hunnam@seoul.co.kr
2020-11-1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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