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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아시타비(我是他非)/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아시타비(我是他非)/김상연 논설위원

김상연 기자
김상연 기자
입력 2020-12-20 20:28
업데이트 2020-12-2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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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대학교수들이 그해의 세태를 반영한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교수단체들이 교수들을 대변하기 위해 1992년 창간한 ‘교수신문’ 주관으로 2001년부터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고 있는데, 주로 유교나 불교 경전 등에서 발췌한 단어를 선정해 왔다. 교수신문은 20일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발표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뜻으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시쳇말을 한자어로 옮겨 새로 만든 말이다. 교수신문이 신조어를 사자성어로 선정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여야, 진보와 보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사이는 물론 코로나19를 놓고도 도처에서 내로남불이 불거졌다는 뜻에서 아시타비를 뽑았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아시타비가 내로남불의 고급 버전이라는 설명도 나오는데, 여기엔 한문을 우러르는 사대주의가 녹아있다. 언어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일 뿐 우열을 갖지 않는다. 한자는 마치 심오한 철학이 담긴 것처럼 인식되곤 하지만 실은 사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로 가장 원시적인 글자라 할 수 있다.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순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조합한 내로남불이 훨씬 고급스런 사자성어다. 사자성어는 글자 네 개로 하나의 단어를 이룬다는 뜻이므로 반드시 한문일 필요는 없다. 아시타비 대신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뜻의 영어 문장 ‘I am Right, You are Wrong’의 이니셜을 따서 ‘IRYW’라고 해도 훌륭한 사자성어가 될 수 있다.

연말마다 그해의 한자를 뽑는 것은 다른 한자 문화권에서도 보인다. 일본은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중국은 국가언어자원관측연구센터가, 대만은 타이베이시 문화국에서 선정한다. 한자가 국어인 중국과 대만은 정부 기관에서, 일본은 한자 관련 기관에서 주관하는 셈이다. 한국처럼 교수 사회 전체가 나서 한자를 선정하는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아직도 한국의 지식인 사회 저변에 중화사상이 스며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교수들이 매년 사자성어로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발상에도 어찌 보면 전근대성이 묻어 있다. 학자는 불철주야 학문에만 매진하면 될 뿐 사회를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미국이나 영국은 출판사에서 ‘올해의 단어’를 선정한다.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학자가 정치를 좌지우지한 나라였다. 그 종말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대로다. 그 이상한 DNA가 인터넷이 날아다니는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것 같다. ‘폴리페서’(정치인+교수)라는 단어는 너무 협소해서 이 광범위한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너나잘해’, 아시타비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순우리말 사자성어다.

carlos@seoul.co.kr
2020-12-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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