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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피겨 소녀가장의 짐/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열린세상]피겨 소녀가장의 짐/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입력 2010-03-24 00:00
업데이트 2010-03-2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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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선수가 2009~2010시즌을 마무리하는 세계 피겨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올림픽을 치르고 나서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다시 얼음판 위에 섰다. 척박한 여건 속에서 세계 피겨퀸으로 우뚝 선 그녀는 진정 우리의 자랑이요 보배다. 그러나 한국 피겨스케이팅계를 지금 이 어린 숙녀가 혼자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라 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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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김연아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는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녹화한 미국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연아가 받고 있는 중압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서는 연아에게 올림픽 메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하질 않았는데, 중압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대신, 오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변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이 연아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임을 강조하면서, 올림픽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연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워주려고 애썼다고 한다. 다만, 그가 연아에게 주문한 것은 ‘올림픽을 즐기고 얼음판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집중 하는 것’이었다.

대견하게도 연아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냈고, 올림픽 금메달로 온 국민의 기대에도 부응했다. 그 커다란 중압감을 비로소 내려놓게 된 것이다. 적어도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엔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세계선수권에는 몇 번이나 도전할 것인지, 다음 올림픽에 대한 계획은 어떤지 묻기에 바빴고, 앞으로도 그녀가 계속 그 자리를 지켜주길 요구했다. 20살 어린 숙녀에게 숨쉴 틈조차 주지 않고 그저 우리의 바람만 전했던 것이다.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한 대학생을 상담한 적이 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여 등록금과 용돈을 마련하고 부모님 생활비도 부담했던 이 청년은 재즈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원하던 공부를 하지 못했던 이 학생은 재즈공부를 하러 미국에 가고 싶은데, 가족 때문에 이도 저도 계획을 못 세우고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부모님은 충분히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난 그에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재즈 공부를 하고 싶으면 떠나라고. 그동안 가족을 위해 할 만큼 했다고. 부모님도 더 이상 자식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셔야 한다고. 처음엔 힘들겠지만 결국엔 그렇게 하실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리고 이제는 너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연아를 보면 한국 피겨계의 소녀가장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스로 벌어 훈련을 해야 하고, 후배들의 척박한 훈련 현실을 걱정해야 하고, 이들이 마음껏 연습할 수 있는 빙상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고민하고, 장학금을 마련하고, 해외 전지훈련을 지원하고, 연아만 바라보고 있는 빙상연맹과 온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이 어린 숙녀가 지녔던 짐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 한국 피겨스케이팅계의 소녀가장으로서 성장기를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연아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그녀가 맺은 열매를 넘치게 만끽했다. 이제는 연아가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가 도와줄 차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짐을 덜어 주어야 한다. 그녀가 꿈나무들을 걱정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충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피겨 재원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 그래서 많은 포스트 연아가 탄생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그 자체로 즐길 줄 아는 성숙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연아도 자신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연아가 선수생활을 계속하든, 혹은 프로로 전향하든, 아니면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가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이제 우리는 그 결정을 존중하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
2010-03-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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