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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화·절·인(和·切·忍)/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열린세상] 화·절·인(和·切·忍)/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입력 2011-03-26 00:00
업데이트 2011-03-26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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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지진 참사와 관련해서 일본인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일본문화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며칠 동안 일본인은 차분하게 질서를 유지했다. LA 지진이나 이집트 사태에서 발생한 혼란이나 폭력과는 분명히 달랐다. 방사성물질이 확산되면서 사재기 등과 같은 행동의 변화가 있었지만, 심각한 위기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절제와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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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일본문화는 화(和)·절(切)·인(忍)의 문화로 불린다. 603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성문 헌법에서 ‘화를 중시한다.’고 기술하면서 ‘화의 문화’는 일본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화의 문화’는 규율과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사이의 상호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절’은 나와 남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은 창피한 것을 아주 중요시하며,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창피한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나의 경계를 지키는 ‘화의 문화’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튀는 행동을 하면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창피한 행동 역시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규율과 질서를 지키고, 조직과 제도 안에 나를 위치시키는 일은 ‘인’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표출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다. 참는 것은 소중한 가치지만, 때로는 자신을 억압하기도 한다.

지진해일이 일어난 이후 일본 언론, 특히 NHK가 보여준 보도는 그동안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만든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지만 ‘화의 문화’라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한다. NHK는 피해를 집중보도하기보다는 질서 있는 대응방안을 말하고, 흥분하기보다는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부정적 태도보다는 긍정적 태도로 안정과 질서를 강조했다. 그만큼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사건을 보도했다.

이에 비하면 우리 언론의 보도에는 여러 가지의 바람직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민족주의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난과 피해자의 고통을 극화했으며, 그것은 썩 자극적이며 선정적이었다. 그동안 국내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은 관행으로 일본 대지진을 보도했다. 우리 언론계 내부에서도 반성과 비판이 나오고 있다.

우리의 재난보도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NHK의 보도방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NHK의 재난 보도에서 따라야 할 점은 흥분하지 않는 절제와 냉정함이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지만, 일본 국민이나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NHK나 일본 언론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환경 감시기능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일본 정부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준에 그침으로써 악화되는 위기상황에서 언론들은 제대로 된 환경의 감시와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우리는 일본 지진해일과 방사능 오염을 접하면서 일본문화가 지니고 있는 절제와 규율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일본인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질서와 규율을 잘 지키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이 지금의 일본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잠재해 있다.

사실상 한 나라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지리와 풍토와 같은 변하지 않는 구조다. 일본의 문화가 화·절·인의 문화라면, 그것은 쇼토쿠 태자가 ‘화’를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지리적 풍토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일본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해주고 함께 나누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본의 문화적 성향을 이상적인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일본과 다른 지리와 풍토 그리고 사회환경 속에서 형성된 정(情), 한(恨), 아우름이라는 소중한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1-03-2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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