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김현숙이 낯선 영애씨

배우가 한 캐릭터로 6년 가까이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케이블채널 tvN의 리얼 다큐멘터리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막영애)의 주인공 김현숙(34) 얘기다. 그는 “이제 촬영장이나 길에서 ‘영애’가 아닌 현숙이라고 불리면 어색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출산드라’로 떴을 때는 가끔 그런 이름으로 불렸는데, 요즘은 열에 아홉은 영애라고 부른다고 했다. ‘막영애’ 출연을 결정했을 때는 한 지상파 방송의 CP가 불러 “왜 케이블에 나가느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그는 “판타지 드라마만 판치던 시절, 시청자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을 것 같아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대입 재수생 시절부터 고깃집과 분식집, 칼국수집 등 생업 전선에 뛰어든 그였기에 퇴근길 치킨과 맥주 한 잔에 위안을 찾는 직장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달 27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의 촬영장에서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1’의 주요 출연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산호, 김현숙, 강예빈.
그렇게 2007년 4월 첫 방영된 드라마 ‘막영애’는 지난달 29일 열한 번째 시즌을 맞았다. 16회로 구성된 시즌마다 케이블채널로선 보기 드물게 시청률이 3%를 넘나들었다. 시즌을 마무리하고 2개월 정도 휴식을 취할 때면 우울증에 시달리는 건 시청자가 아닌 제작진과 출연배우라고 한다. 그만큼 ‘막영애’에 녹아들어 출연진이 가족이고, 이들의 일은 연기가 아니라 직장생활이다.

지난달 27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의 촬영장에서 케이블채널 tvN의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1’의 주요 출연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있다. 왼쪽부터 김산호, 김현숙, 강예빈.
지난달 27일 찾아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의 한 건물 5층. ○○제록스, ○○토건 등 실제 사업장 사이에 영애의 직장인 광고기획사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마주 본 책상, 그 위 서류뭉치까지 여느 사무실과 비슷하다. 책상 앞에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잡담에 열중하고, 한쪽 탕비실에선 새 사장에 대한 신랄한 뒷담화가 오갔다. 촬영팀은 남자 화장실까지 카메라를 들이민다. ‘리얼 다큐’다.

대리사장 역으로 합류한 배우 성지루(44)는 “척 하면 탁, 할 만큼 호흡이 잘 맞고 분위기가 좋다.”고 전했다. 화기애애해도 녹화 신호가 떨어져 성지루가 ‘새 사장’으로 변하는 순간,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 온 극중 커플 김현숙과 김산호(31)의 삶은 쪼들리고 직장생활은 더 팍팍해진다. “매 시즌 시대상을 반영하며 삶의 애환을 치유하려 했는데 최근 극중 러브라인이 강조되며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다. 이번 시즌에는 회사에 치이고 불경기에 울상이 된 직장인과 그 가족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담으려 한다.” 박준화 CJ E&M PD가 말하는 이번 시즌의 기획 의도다.

촬영장에서 만난 김현숙은 5년 전 접한 제작진의 첫인상에 대해 “진짜 막돼 먹었다.”고 떠올렸다. “라디오DJ로 활동할 때 (tvN 쪽에서) 전화가 왔는데, ‘당신을 위해 쓴 대본이 있으니 만나자’고 다짜고짜 통보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인지 얼굴이나 보자면서 갔는데 정한석 PD와 ‘막돼먹은’ 작가들이 ‘우리나라 여배우들은 왜 잘 때도 눈썹을 붙이는가, 우린 그런 것 다 타파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거예요.” 말인즉, 주인공이긴 한데, 절세미인이 아니다. 제목도 ‘막돼먹은 고소영, 심은하, 이영애’ 마구 늘어놓더니 이영애가 가장 예쁘다며 ‘막돼먹은 이영애씨’로 낙점했다가 방송 직전 영애씨로 바뀌었다고 했다.

장르는 또 어떤가. 다큐 드라마라는 생소한 장르였지만 촬영 전까지 마땅한 설명도 없었다. 담당 PD조차 “찍어 봐야 알겠다.”고 했고, 작가들은 “대본 좀 보여 달라.”는 김현숙에게 허구한 날 술만 먹였다. 배우의 특징을 세심하게 관찰한 뒤 그에 맞춰 대본을 쓰겠다는 뜻이다. 이런 제작진의 성향은 지금도 여전한지 이번 시즌에 투입된 강예빈(29)이 맞장구를 놓는다. 그도 “하루 종일 여성 작가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 뒤에야 캐릭터가 정해졌다.”고 말한다.

시즌11까지 오면서 직장인의 애환을 보여줄 만큼 보여준 김현숙은 “이제 커리어우먼이 아닌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는 ‘생활밀착형’ 영애가 돼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은근 기대하는 것이 있는 듯 되물었다. 극중 애인인 김산호는 “영애와 산호를 시즌11에선 기어코 결혼시킬 것이란 얘기가 촬영장에 돌고 있다.”면서 “영애 입장에선 가장 행복한 선택 아니겠느냐.”고 거들었다.

뮤지컬 스타로, 지상파 방송의 아침드라마 주인공으로 맹활약 중인 그에게 “젊고 늘씬한 미녀들과 연기하다가 ‘막영애’에 오면 분위기가 섬뜩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유독 영애 앞에서는 풀이 죽는 그가 “이곳이 더 좋다.”며 피식 웃었다. ‘절대 영애에게 대들거나, 영애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막영애’의 불문율이 있다던데, 온몸에 각인된 듯하다. “시즌 초반 한참 영애를 괴롭힐 때는 미니홈피에 ‘길 가다 나 만나면 다친다’, ‘게이처럼 생겼다’는 쪽지가 쇄도했어요. 영애를 괴롭히던 비호감 캐릭터에서 호감형으로 돌아섰더니 오래 가네요.” 시즌6부터 ‘막영애’에 출연한 김산호가 말하는 ‘장수 비결’이다. 그러자 김현숙이 으레 그 당당한 표정으로 농을 던졌다. “그동안 극중 남자친구가 수없이 갈렸는데, 이제 산호도 만날 만큼 만났으니 싫증날 때가 됐죠.”

우리 사회가 말하는 미의 기준과 다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막영애’는 외모지상주의의 그림자를 얼마나 걷어내려고 노력했을까. 김현숙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살과) 더불어 사는 게 더 자연스럽다. 평범해 보이려고 코디네이터도 두지 않고 가방도 늘 같은 걸 든다. 다른 영화 촬영 때 몸무게를 6㎏ 줄이고 복귀했더니, 제작진에 비상이 걸렸다. ‘매일 고기를 먹여서라도 살을 찌워야 한다’고 입을 모으더니, 두 달 만에 몸무게를 돌려놨다.”

잠자코 있던 강예빈은 고민이 많은 듯 보였다. 이종격투기 UFC의 ‘옥타곤걸’로 섹시한 이미지가 굳어진 탓이다. 두 번째 드라마인 ‘막영애’에 출연하면서 “내 모습 그대로 연기만 하면 되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섹시함에 가려진 다른 모습을 ‘막영애’에서 드러내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직장인들의 힐링 드라마로 자리 잡은 ‘막영애’가 얼마나 생생한 이야기와 색다른 모습을 풀어낼지 기대감이 커진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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