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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먼지 뒤집어쓴 소방관들 외면 못 해… 비극은 아직도 진행형”

“하얀 먼지 뒤집어쓴 소방관들 외면 못 해… 비극은 아직도 진행형”

이경주 기자
이경주 기자
입력 2021-09-12 20:42
업데이트 2021-09-13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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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가게 통째로 내줬던 윤건수씨

식료품점 운영… 먹을 것과 쉼터 등 제공
가게서 숙식하며 밤낮으로 소방관 도와
‘폐암’ 배달업자 2명에 근로 증명서 써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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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수씨
윤건수씨
“20년이나 지났지만 2001년 9·11 테러 때 우리 식료품점에 물건을 배달하던 업자 2명이 올해 3월과 6월에 폐암이라고 찾아왔어요. 정부에서 치료비를 받으려면 당시 우리 가게를 위해 일했다는 증거서류가 필요하다고 해서 서명을 해 줬죠.”

9·11 테러 20주년 추모일인 11일(현지시간) 자신이 운영하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식료품점에서 만난 윤건수(60)씨는 “세계무역센터(WTC)가 무너지면서 석면 같은 것이 눈처럼 내려 거리는 온통 하얗게 됐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맵고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는데 그게 두고두고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윤씨는 그날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며 파키스탄계 지인이 만들어 준 때가 탄 앨범을 꺼냈다. 90여장의 인화 사진들은 건물 붕괴 순간, 먼지를 뒤집어쓴 소방관, 처참하게 구겨진 비행기 엔진 등을 담고 있었다. 그는 당시 가게 물건으로 지친 소방관들을 먹이고, 화장실을 개방하는 등 식료품점을 쉼터로 활용해 지역에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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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가 무너진 뒤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돌아오고 있다. 윤건수씨 제공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가 무너진 뒤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돌아오고 있다.
윤건수씨 제공
24시간 가게를 운영하던 윤씨는 “WTC 붕괴에 경찰은 대피명령을 내렸지만 한동안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거리로 나갔다”며 “그때 먼지를 뒤집어쓴 소방관에게 씻을 물과 수건을 건넨 게 시작이었다”고 회상했다. 윤씨의 가게는 현장에서 불과 800m 떨어진 데다 통제선 바로 밖이었고 남부 맨해튼 전체에서 문을 연 식료품점 2곳 중 한 곳이었다. 소방관들은 자연스레 윤씨의 가게 앞 도로에 널브러져 쉬었다. 그는 “4시간 구조활동, 2시간 휴식을 반복하는 소방관들에게 처음에는 맥주와 담배를 가져다주었고, 나중엔 그냥 뭐든 가져다 먹으라고 했다”며 누구라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의 선행이 알려지자 경찰들은 소방관의 아침 식사에 필요한 달걀, 우유 등이 가게에 원활히 배달되도록 도왔고, 정전 상황에서 무상으로 발전기를 대여해 준 이도 있었다. 가게에서 숙식하며 밤낮없이 소방관들을 돕던 그는 1주일이 지나서야 귀가했고, 3만 달러(약 3500만원) 정도의 손해를 봤다. 하지만 윤씨는 얻은 게 더 많다며 “미국 방송에 소개돼서 그런지 화재보험을 들었던 회사에서 테러 관련 상품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손해를 보상해 줬고 동네 이웃들에게 신뢰도 얻었다”고 했다.



뉴욕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2021-09-1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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