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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설계자 덩샤오핑...김일성 두 번째 남침 야욕 꺾어

한중수교 설계자 덩샤오핑...김일성 두 번째 남침 야욕 꺾어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19-11-10 23:20
업데이트 2019-11-1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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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외교비화] ②한중관계의 성장

1966년 실각됐다가 어렵사리 중앙 정치무대로 돌아온 덩샤오핑(오른쪽)이 1974년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다. 본래 흑백사진이었지만 컬러 사진으로 복각됐다. 서울신문 DB
1966년 실각됐다가 어렵사리 중앙 정치무대로 돌아온 덩샤오핑(오른쪽)이 1974년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다. 본래 흑백사진이었지만 컬러 사진으로 복각됐다.
서울신문 DB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 70주년과 한중 수교 27주년이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1950~1953) 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등 적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1992년 수교한 뒤 세계 외교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2016년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빙하기’를 맞았다. 중국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 정세가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이에 1970년대 미중 화해를 시작으로 20여년 뒤 한중수교가 이뤄지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이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 살펴보고 두 나라 관계의 미래도 함께 전망해보고자 한다. 전·현직 중국 주재 외교관·특파원 등이 만든 계간지 ‘한중저널’ 창간호(9월)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문헌·자료를 요약 정리했다.

●“덩샤오핑 복귀 거대한 사건...한중 수교에도 큰 영향”

한중 수교의 산실이 되는 외교부 동북아2과는 1973년 신설됐다. 기존 동남아과 한 구석에서 별도의 출입문도 없이 셋방살이처럼 시작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청와대로 중국의 정세와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가 속속 올라갔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보고서는 덩샤오핑(1904~1997)의 복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문화대혁명(1966~1976) 초기 베이징대에 반대 대자보가 붙자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각해 유배 생활을 했다. 그 때부터 줄기차게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편지를 보내며 재기를 노렸다. “제 잘못을 인정하오니 부디 직접 만나뵙고 지시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1967), “죽어라고 마오쩌둥 사상만 공부했다”(1969), “제 가장 큰 잘못은 마오쩌둥 사상이란 위대한 깃발을 높이 쳐들지 않은 것이다”(1972) 등 내용을 담았다. 결국 그는 고희(古稀)를 앞둔 1973년 2월 어렵사리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외교부 동북아2과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덩샤오핑의 복귀는 중국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모르는 거대한 사건이다. 한중 수교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외교부의 전망은 꽤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이 중국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은 한중 교류를 권유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이야 미국과 중국이 세계 패권을 두고 맞서는 라이벌 관계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은 미국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되레 미국은 중국의 국민소득을 높여 자연스레 서구화의 길을 택하도록 도우려고 했다. 중국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해 자유주의 진영을 위협할 대국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시각은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일본 정부개발원조(ODA) 관련 전문가들은 “중국은 국토가 너무 크고 지역간 편차도 심하다. 국가 전체가 균일하게 성장하기 어렵다”면서 “중국이 발전은 하겠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릴 것”으로 보고했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하지 않았다면 미일 두 나라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을 수도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막 시작한 1981년 10월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덩샤오핑 주석이 사열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열병식에서 덩 주석은 중국 개혁개방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서울신문 DB
중국이 개혁개방을 막 시작한 1981년 10월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덩샤오핑 주석이 사열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열병식에서 덩 주석은 중국 개혁개방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서울신문 DB
●덩샤오핑 “한국과 수교하면 해는 없고 이득만 두 가지”

중국이 긴 잠에서 깨어나 경제발전에 매진하던 1980년대만 해도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1919~2005)과 후야오방(1915~1989)이 실각했고 개혁개방 방향을 둘러싼 논란도 컸다. 특히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빈부격차가 커지자 덩샤오핑의 개방 노선을 두고 보수파 천윈(1905~1995)의 반대가 상당했다. 그가 혁명가 출신이다보니 덩샤오핑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 당시 외교부장으로 한중 수교 때 중국 측 대표로 서명한 첸지천(1928~2017)은 회고록 ‘외교십기’에서 “수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온갖 반대파가 생겨났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중한수교에 대해 ‘무해양득’(손해는 하나도 없고 이득이 두 가지나 있다는 뜻)이라는 논리로 굽히지 않고 밀어 붙였다”고 적었다. 한국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고 한국과 대만의 외교 관계도 단절시킬 수 있어 1석2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수교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식으로 페타콩플리(기정사실화)하며 반대파를 모두 설득했다. 덩샤오핑은 한중수교의 설계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과 덩샤오핑이 1991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이 때가 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다. 2004년 중국 시사 격주간지 ‘세계지식’에 소개됐다. 사진 왼쪽부터 덩샤오핑, 덩의 딸 덩룽, 통역사 2명, 김일성. 서울신문 DB
김일성과 덩샤오핑이 1991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이 때가 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다. 2004년 중국 시사 격주간지 ‘세계지식’에 소개됐다. 사진 왼쪽부터 덩샤오핑, 덩의 딸 덩룽, 통역사 2명, 김일성.
서울신문 DB
●中, 김일성 남침 지원 요청 거부...“北, 남한과 대화해야”

특히 그는 제 2의 한반도 전쟁을 막아내기도 했다. 미 우드로윌슨센터 북한국제문서연구사업(NKIDP) 프로젝트팀이 최근 발굴한 옛 공산권 국가의 비밀 외교전문에 따르면 1975년 4월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은 급히 중국을 찾아갔다. 김 주석이 방중한 전후인 4월 17일과 30일에 캄보디아 프놈펜과 베트남 사이공이 공산반군에 함락됐다.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혁명에 고무돼 남한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하고자 중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앞에서는 남한과의 화해 분위기를 띄우는 듯 했지만 뒤로는 또 한 번 전쟁을 기획한 것 같다. 자칫 한반도에서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베이징에 간 김 주석은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오쩌둥(1893~1976) 주석과 저우언라이(1898~1976) 총리를 각각 한차례 면담했다. 자신이 원하던 답을 얻지 못한 그는 덩샤오핑 부주석과 19, 20, 21, 25일에 걸쳐 마라톤 담판을 벌였다. 덩 부주석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지원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되레 그는 김 주석의 도발 의지를 만류하며 1971년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으로 시작된 대화 분위기를 이어갈 것을 강조했다. 중국은 1976년 8월 북한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벌였을 때도 유보적 반응을 보이며 김 주석을 편들어 주지 않았다. 수교 이전부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79년 미국 텍사스를 방문한 덩샤오핑이 미국 측에서 선물로 받은 카우보이 모자를 직접 써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의 개혁개방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평가받는다. 서울신문 DB
1979년 미국 텍사스를 방문한 덩샤오핑이 미국 측에서 선물로 받은 카우보이 모자를 직접 써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의 개혁개방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평가받는다.
서울신문 DB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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