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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이후 고종 살린 美선교사 ‘철가방’

을미사변 이후 고종 살린 美선교사 ‘철가방’

입력 2010-04-07 00:00
업데이트 2010-04-07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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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중순. 을미사변(10월8일)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직후라 경복궁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홀로 남은 고종은 궁의 친일파 세력이 자신마저 독살한다는 생각에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당시 고종을 도운 것은 서양인의 ‘배달 철가방’이었다. 후일 연세대를 창립한 미국 선교사 H.G. 언더우드가 미국 등 서양 공관에서 만든 음식을 자물쇠를 채운 양철통에 담아 날랐던 것. 고종은 겨우 연명했지만 일본 측의 포로와 마찬가지였다.

11월28일 친위대가 왕을 구출하고자 궁의 동쪽 문인 춘생문(春生門)을 통해 궁궐 진입을 시도했으나 전투에 패했다. 포성이 밤새 궁궐을 울렸고 고종은 언더우드와 동료 선교사 에비슨을 방패 삼아 가까스로 피살을 모면했다.

이처럼 조선 왕실과 서양 선교사들의 인연을 보여준 ‘춘생문 사건’이 언더우드 내한 125주년인 올해를 맞아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지만, 배달에 쓰인 양철통 등 관련 유물은 행방이 묘연하다.

7일 연세대 박물관에 따르면 춘생문 사건을 재조명하고자 올해 초부터 선교사 보고서 등 관련 사료를 정리하는 한편 당시에 사용된 양철통과 사진 등의 유물을 찾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사실 이 사건은 다음해 일어난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태)의 유명세에 가려 역사학계 바깥으로는 널리 알려지지도 못했다.

김도형 박물관장(사학과 교수)은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은 민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고자 왕실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며 “이런 흥미로운 사건을 대중에게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유물이 아직 나오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고종과 선교사들의 관계에는 복잡한 외교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을미사변 뒤 김홍집이 이끄는 친일내각이 친미ㆍ친러파인 옛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입지를 넓히고자 고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해석이다.

실제 미국과 러시아 공사는 을미사변 이후 선교사들 못지않게 자주 고종을 알현하며 왕의 신병을 보호하려고 했고, 언더우드는 후일 친미파 고위관료를 집에 숨겨주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해줬다.

이 때문에 일본은 춘생문 사건을 ‘서양 세력이 주도한 국왕 강탈극’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고종이 언더우드 등의 보호를 받았다는 점을 들어 미국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비난하며 을미사변의 만행을 물타기하려 한 것이다.

연세대 박물관은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부터 언더우드의 철가방을 비롯한 당시의 유물을 기증받고자 계속 수소문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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