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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감사의 시간

사랑과 감사의 시간

입력 2016-02-04 17:44
업데이트 2016-02-0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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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서설(瑞雪)이 내린다. 설날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에 내리는 은총의 서설이다. 서설을 뭉쳐 눈사람을 만든다. 저 눈사람에게도 인생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눈사람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처럼 분명 짧을 것이다. 눈이 그치고 햇살이 내리비치면 눈사람은 곧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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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정호승 시인
설날에 눈사람을 바라보며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을 생각한다. 청춘 시절에 나는 “쇠털 같은 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고 생각했다. 소의 몸에 박혀 있는 털을 헤아릴 수 없듯이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망망대해에 나가면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한 잎 나뭇잎과 같은 것처럼 아무리 쇠털처럼 많은 인생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인생이라는 바다에 나가면 한순간의 시간일 뿐이다.

예순 중반을 넘어 ‘고령인구’에 속하게 된 나는 인생이라는 시간의 빠른 속도를 절감한다. 그동안 허겁지겁 사는 데 바빠 인생이라는 시간의 짧음과 그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시계는 살 수 있어도 시간은 살 수 없는데, 마치 시계를 사면 시간 또한 필요한 양만큼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아무리 고가의 시계라 할지라도 그 시간의 가치가 똑같고, 아무리 돈과 권력을 지닌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가치는 똑같은데 그러한 진리를 잊고 살아왔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인생의 상대적 시간을 절대적 시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다. 상대적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한 물리적 시간이라고 한다면, 절대적 시간은 그 상대적 시간을 나 스스로 재창조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인생은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더욱 짧아질 뿐이다.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께서는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 시간”이라고 했다. 이 인생이라는 짧은 자유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이다.

설날은 사랑의 가치를 성찰하게 하는 명절이다. 설날이 되면 ‘새로움’과 ‘새출발’을 선물한 시간에게 감사하고 부모와 조상의 은덕에 감사해야 한다.

설날에 찾아갈 고향 집이 있고, 그 고향 집에 부모님이 계시고 찾아뵐 친인척 어른들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나는 찾아갈 고향 집도 없고 찾아뵐 친인척 어르신도 없다. 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스승도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정성껏 세배 드릴 분조차 없다. 아흔넷 노모만이 이미 대화의 기능을 잃은 신 채 자리보전을 하고 계신다. 그래도 아직 노모가 살아계시니까 누워 계신 그대로 세배를 올리리라. 그리고 “왜 세뱃돈을 주시지 않느냐”고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리라.

이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 그 누구도 세배 드릴 분이 없다. 세뱃돈을 주실 분도 없다. 나는 아직 세뱃돈을 받고 싶은데, 이제 세뱃돈을 줘야 할 데만 있다. 아직 세배 드릴 분이 있고, 아직 세뱃돈을 받을 데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이다. 설날에 그러한 축복을 깊게 깨닫고 감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인생이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정호승 시인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등이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이 있다. 1989년 소월시문학상, 2000년 정지용문학상, 2001년 편운문학상, 2008년 상화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2016-02-05 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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