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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위의 별들, 스승 위한 멜로디 빛낸다

건반위의 별들, 스승 위한 멜로디 빛낸다

입력 2013-07-29 00:00
업데이트 2013-07-2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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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공연 앞둔 사제 피아니스트 정진우· 김영호 교수

“‘빗방울 전주곡’ 어떠세요? 제가 따라갈게요. 선생님 먼저 치세요.”

여든을 훌쩍 넘긴 노스승과 이순(耳順)을 앞둔 제자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을 힘있게 두드리는 사제의 호흡이 전날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척척 맞아들어갔다.
피아니스트 김영호(오른쪽) 연세대 교수는 오는 8월 20일 오마주 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의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1악장을 스승 정진우(왼쪽)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바친다. 김 교수는 “선생님께서 틀에 맞춘 테크닉 대신 음악에 대한 사랑부터 가르쳐 주셨던 게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피아니스트 김영호(오른쪽) 연세대 교수는 오는 8월 20일 오마주 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의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1악장을 스승 정진우(왼쪽)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바친다. 김 교수는 “선생님께서 틀에 맞춘 테크닉 대신 음악에 대한 사랑부터 가르쳐 주셨던 게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두 사람의 시계는 순간 47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피아노를 막 알아가던 열 살 소년과 그에게 열정을 불어넣어준 30대 후반의 젊은 교수로 말이다. 스승에게 소년은 야단칠 일이 없는 영민한 제자였다. 소년에게 스승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1966~1968년 서울 약수동에서 앞뒤 집에 살며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은 어느덧 1·2세대 대표 피아니스트로 한국 피아노 역사를 떠받치고 있다. ‘피아노의 대부’ 정진우(85)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영호(57)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다.

정 교수는 ‘정진우 사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자들을 몰고 다닌다.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이대욱 한양대 교수, 강충모 줄리아드음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문익주 서울대 교수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제자들의 선생님 사랑은 극진하다. 스승의 회갑·고희·팔순 음악회를 일일이 다 챙겼다. 매년 1월 8일 정 교수의 생일에는 어김없이 생신축하 겸 신년회 자리가 벌어진다.
1971년 서울신문사에서 개최한 정진우 교수의 음악회 포스터. 200~500원의 티켓가격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71년 서울신문사에서 개최한 정진우 교수의 음악회 포스터. 200~500원의 티켓가격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제자들이 이번에도 스승을 위해 뭉쳤다. 새달 17~24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여는 제2회 ‘피스(평화) 앤 피아노 페스티벌’에서 정진우 교수를 위한 ‘오마주 콘서트’를 마련한 것. 피아니스트 15명 등 20여명의 연주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정 교수에게 소감을 묻자 “미안하다”는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고맙고 미안하죠. 다들 대학 교수들이고 바쁜 사람들인데 일부러 이런 행사까지 열어주니 미안할 따름이죠.” 스승의 무안함을 제자가 지우려 나섰다. “전원이 너무나 흔쾌히 응했는 걸요.”(김 교수)

오마주 콘서트에서는 정 교수의 인생 역정도 사진과 영상으로 펼쳐진다. 본디 그는 의학도였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194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터지자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1951년 중공군이 포위한 강원도 성지봉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동상으로 썩어버린 두 발을 결국 잃고 말았다. 발등까지 잘라낸 그는 절망을 딛고 1952년 전쟁 통에 부산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다. 언론은 그런 그에게 ‘비운의 삶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피아니스트’라는 헤드라인을 붙여줬다.

“‘아버지 하라는 대로 해서 발을 다쳤으니 이젠 정말 나 하고 싶은 거 하겠다’ 해서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갔어요. 그런데 졸업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당시 현제명 서울대 음대 학장이 빈까지 쫓아왔어요. 음대 교수를 맡아달라는 거예요. 공항에 도착하니 음대 교수들이 다 마중을 나왔더라고.”(웃음)

그렇게 그는 피아노계의 큰 스승으로 후배 피아니스트들의 밑거름이 됐다. 반주에 그쳤던 피아노의 역할도 실내악 연주, 레퍼토리의 다양화 등으로 어엿한 악기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는 요즘도 제자들의 연주회가 있으면 지방까지 쫓아다닌다.

반세기를 건너 세계 무대에서 놀랍도록 성장한 국내 피아니스트들에게 ‘정진우’라는 이름 석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제자마다 추억이 다 다르겠죠.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모든 제자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다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3-07-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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