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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로 내몰렸던 K실험미술, MZ 관객에 환호받다

‘퇴폐’로 내몰렸던 K실험미술, MZ 관객에 환호받다

정서린 기자
정서린 기자
입력 2023-07-02 14:20
업데이트 2023-07-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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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 거장인 이건용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일환으로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한국 실험미술 거장인 이건용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일환으로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8일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300여명의 관람객이 노작가의 퍼포먼스에 환호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주인공은 실험미술의 거장 이건용(81) 작가. 그가 1979년 브라질 상파울루 국제비엔날레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퍼포먼스 ‘달팽이 걸음’을 재연하는 자리였다.

15m 길이의 검은 고무 장판 위에 맨발로 올라선 작가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 좌우로 거침없이 흰 분필 선을 그어나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간중간 일어선 그에게 관람객들은 “힘내세요” “화이팅”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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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실험미술의 거장인 이건용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국내 실험미술의 거장인 이건용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25분여 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그가 그린 선을 그의 발자국이 지워낸 ‘달팽이 걸음’의 전모가 관람객들의 시선에 가득 들어왔다.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현대문명의 빠른 속도를 가로질러 보자는 취지의 작품은 한국 전위예술 1세대로 반세기 가까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견지해 온 그의 삶과 닮은 모습이었다. 이날 그의 퍼포먼스에 동참한 관람객들은 현장에서만 320명, 온라인 라이브에 접속한 300명 등 모두 620명에 이르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구겐하임미술관과 함께 기획한 ‘한국 실험미술 1960~1970년대’전과 연계해 이뤄진 이건용 작가의 퍼포먼스는 당시 ‘불온한 것’, ‘퇴폐적인 것’으로 내몰리며 억압받았던 우리 실험미술이 국내뿐 아니라 세계 미술계에서 지니는 당당한 위치와 가치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전시는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가 이뤄지던 시기, 사회적 불의와 폭압, 보수화된 기성 세대의 형식주의 등에 반발한 대표 작가들을 주인공으로 불러모았다.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등 작가 29명의 대표작 95점과 자료 30여점이 모였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MZ세대, 외국인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50~60년 전 청년 예술가들의 비판적 실험 정신과 도전적 발상에 교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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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국전 심사 비리가 터진 1968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아래에서 기성 문화계를 ‘타살’하는 비판적 퍼포먼스인 ‘한강변의 타살’의 한 장면. 국립현대미술관·황양자 제공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국전 심사 비리가 터진 1968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아래에서 기성 문화계를 ‘타살’하는 비판적 퍼포먼스인 ‘한강변의 타살’의 한 장면.
국립현대미술관·황양자 제공
국전 심사 비리가 터진 1968년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밑에 각자 들어갈 구덩이를 파고 목만 내놓은 채 묻혀 관람객들의 물세례를 받았다. 흰 페인트로 ‘문화 사기꾼’, ‘문화 부정 축재자’ 등으로 쓴 비닐을 불태우고 매장하며 “죽이고 싶다, 모두”라고 외친 이들은 기성세대와 제도권 문화의 타살이라는 강력한 비판의 메시지를 발화했다. 이를 담은 ‘한강변의 타살’(1968)은 사진 속 인물을 관람객과 같은 크기로 배치한 슬라이드 영상으로 선보여 찬 바람이 불던 한강변 모래사장에 벌어진 당시의 현장에 동참하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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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의 ‘1/24초의 의미’(1969). 달리는 차 안에서 삼일고가도로, 세운상가, 육교, 고층빌딩 등을 촬영해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도시 풍광과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도시인을 대조시켰다.  © 김구림, 사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제공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1969). 달리는 차 안에서 삼일고가도로, 세운상가, 육교, 고층빌딩 등을 촬영해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도시 풍광과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도시인을 대조시켰다.
© 김구림, 사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제공
1970년대 ‘절대 진리’로 여겨졌던 세계행정대지도를 300개로 조각내 재배치한 성능경의 ‘세계전도’(世界顚倒·1974)는 국가의 공권력이 극에 달했던 시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고 싶었던 청년 예술가의 열망을 보여준다. 거대한 입술 안 치아 위에 선그라스를 낀 여성의 머리, 가정용 고무 장갑 등을 설치한 정강자의 ‘키스 미’(1967)는 여성이 남성의 성적 시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성적 욕망의 주체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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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 입구에 자리해 있는 정강자의 ‘키스 미’(1967) 연합뉴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 입구에 자리해 있는 정강자의 ‘키스 미’(1967)
연합뉴스
이번 전시는 9월 1일부터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내년 2월 11일부터는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에서 차례로 이어지며 해외 관객과 만난다. 리처드 암스트롱 구겐하임미술관장은 “불확실성과 변화의 시기에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창조하려는 이들의 용기와 상상력, 열망은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준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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