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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 올림픽 성화 들고 달린 길, 그 한 컷의 그리움

[그의 삶 그의 꿈] 올림픽 성화 들고 달린 길, 그 한 컷의 그리움

입력 2011-04-24 00:00
업데이트 2011-04-2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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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인류학자 산공(山公) 강신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한 권은 1988년 올림픽에 관하여 쓴 서울올림픽 연구서 《세계와 함께 나눈 민속문화》이고, 다른 한 권은 사진집 《배움의 길, 기록을 따라가다》이다. 두 권 모두 주인공은 문화인류학자인 강신표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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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축전 마스터플랜을 기획했다. 서울올림픽을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다시없는 기회로 여긴 선생의 노력에 관한 자취가 알알이 배어 있다. 사진집은 선생이 기증한 1,188장의 사진과 필름자료 중에서 가려 뽑은 사진 209점과 10점의 유물사진으로 만들었다. 농촌 계몽운동과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근대의 사진 자료들은 그대로 하나의 문화이다. 대부분이 흑백인 이 사진들이 보여주는 풍경들은 20세기의 격변기를 지나오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문화가 변이고 변화라면 그 와중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그건 동시에 잃어버려선 안 될 것이기도 하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서울올림픽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야 관의 주도하에 정리되어 나온 것도 신기하지만, 우리에게 올림픽 개최는 그만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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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일이지.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축제가 아니에요.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는 세계의 눈이 온통 그 축제로 쏠리잖아요. 언제 다시 있을지 모르는 그 좋은 기회를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처음에 제의를 받고는 마음의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는데,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둘도 없는 기회가 아니겠냐는 말 한마디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지요. 사진집은 내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로 만들었어요.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사진들이지요. 내가 지나온 자취들이기도 한 셈인데,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는 우리의 지난 삶들이 거기에 들어 있어요. 문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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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을 엿보다

선생은 193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은 일본에서 한의학을 전공하고 귀국해 한의원을 한 한의사였다. 한의원은 대대로 이어 내려온 선생 집안의 가업이기도 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양장점을 운영하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란 집안의 바람이 있었지만 나름의 소신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그런데 왜 인류학 쪽으로 진로를 바꾸셨을까?

“처음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거든. 주로 일본에서 공부하신 선생님들이 외국 이론으로 가르치는데, 당시 우리가 처한 사회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컸어요. 요즘에도 그런 질문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찬성’에서부터 ‘매우 반대’까지 다섯 단계로 구분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래요. 이런 질문들 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 질문지 치워놓고 그분들 이야기 듣다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밖엔 안 들었어요.”

공부한 바가 없으니 사회학과 인류학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은 사회학을 버리고 인류학을 택했다. 1967년부터 하와이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이 서구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변모하는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해 한문학과 붓글씨에도 능통했던 선생의 관심이 동서양에 두루 걸쳐 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선생은 일본 중국 한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한문문화권의 특징을 누구보다도 깊게 연구하고 계셨다. 이 점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대한 세계 문화축전의 장으로 만드신 힘일 수도 있겠고. 올림픽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보면 선생이야말로 우리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데 있어 더 없는 적임자였다. 그렇지만 때늦게 출간된 선생의 생과 올림픽에 관한 이 두 권의 소중한 책들을 일반 독자들이 쉽게 만나지는 못하겠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비매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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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봉송

1981년 한국 인류학계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 세계적인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가 한국에 온 거였다. 레비스트로스를 한국에 초청한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강연과 세미나들로 20일 동안 한국에 머문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는 바쁜 스케줄 와중에 통도사에서 사찰문화를 체험하고 하회마을과 국사당에도 들렀다가 돌아갔다. 김금화의 굿도 보았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한국에 초청한 건 나중에 올림픽 문화축전 일을 하는 데 있어 엄청난 도움을 준 계기가 됐어요. 올림픽과 관련해 대외활동을 하는 데 굉장한 영향을 미쳤지. 한국일보사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인 1억5천만 원을 서울올림픽 문화학술대회 준비 후원금으로 지원 약속을 해준 것도 그런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어요.”

선생은 1983년 풀브라이트 시니어 스칼라 과정으로 시카고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했었다. 이 과정 또한 선생의 올림픽 관련 일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그때 시카고대학에서 다섯 번의 공개강연을 했어요. 거기가 인류학이 굉장히 센 곳인데 중요한 사람들이 내 공개강연을 들었어요. 올림픽 문화축전 행사를 기획하면서 시카고대학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존 맥칼룬 교수를 소개해 줬어요. 그 사람이 올림픽 관련해서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지. 쿠베르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선생은 1986년 존 맥칼룬 교수와 브라질의 로베르토 다마타 교수, 예일대학교의 스텐턴 휠러 교수를 미리 초청해 1987년 국제학술대회에 초청할 학자들을 섭외했다. 이때 동구권을 비롯한 비수교권 국가의 학자들도 다수 초청했다.

“비수교권 학자들을 초청했다는 건 냉전의 종식이라는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지. 서울올림픽의 목적 중의 하나가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정립하기 위한 거였는데 비수교권 학자들이 오히려 그 정통성을 부숴버리는, 체제를 부수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었으니 아이러니지.”

선생이 성화 봉송에 관련한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신다.

“성화 봉송을 하는데 성화에서 연기가 나는 거야. 연기가 나지 않는 수입품 성화는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고. 그래서 생각 끝에 외국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 줬지. 예전 한국에는 봉수대라는 게 있어서 연락이 필요할 때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신호를 주고받았었다고. 저 성화는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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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학자의 길

20여 년 전의 올림픽은 이제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지만 인제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선생의 연구열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영원한 열정의 학자시다. 학문적인 계획들을 정연하게 설명해 주신다. 이해가 어렵지만 감동적이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인류학은 결국은 사람에 대한 연구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구일지도 몰라요. 나는 지금도 내 박사학위 논문을 화두로 공부하고 있어요. 그 학위논문의 결론이 이래요. 음양이론이 동아시아 한자문화의 밑바닥에 내재하고 있다는 건데, 이 주제는 지금의 연구에도 이어지고 있지요. 이제 거의 완결단계에 와 있지만, 이 연구 역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나에게 가져다 준 학문적 과제지.”

글을 쓰면서, 선생의 학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부분들을 읽었다. 다음은 그 일부.

“사회학으로 공부를 시작한 나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향한 공부였던 것 같다. 우리의 선배 학인들이 추구했던 삶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은 나를 먼 곳으로 인도하였고, 그리고 가까운 이웃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한국의 문화전통을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정치적 이해와 이념을 떠난 지구촌의 통합된 문화축전으로, 올림픽의 새로운 모델로 세워놓았던 선생은 그렇게 한 분의 문화인류학자로 온전히 다시 돌아가 계셨다. 여전한 열정과 의지를 간직한 채.

글_ 최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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