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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해서 더욱 깊은 할머니 손맛

단순해서 더욱 깊은 할머니 손맛

입력 2012-08-12 00:00
업데이트 2012-08-1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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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임 할머니의 열무비빔국수

나무 타는 냄새가 마당으로 새어나왔다. 매캐한 연기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니, 도래마을 옛집의 살림지기 양동임 할머니(64세)가 가마솥에 불을 때고 있었다. “우리도 평소엔 가스불 쓰는데 오늘 손님이 온다고 해서….” 수줍게 말끝을 흐린 할머니는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물 속으로 소면 두 묶음을 쏟아 넣었다. 커다란 주걱으로 솥을 젓는 할머니 옆에서 국수가 끓기를 기다리다가 채반에 놓인 오이만 한 고추를 통째로 깨물어 먹었다. “달지? 그거 우리가 다 직접 키운 거야, 농약 하나도 안 치고.” 장작불 열기에 지친 듯했던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땅에서 수확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전남 나주에 있는 도래마을 옛집은 1930년대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시민의 자발적인 후원을 받아 복원된 시민문화유산이다. 스물다섯에 전남 화순에서 도래마을로 시집온 양동임 할머니는 다른 두 할머니와 함께 이 집으로 출퇴근하면서 살림을 돌보는 살림지기이다. 묵어 가는 손님 아침상도 보고 일주일에 한 번 직접 농사지은 야채 꾸러미도 보낸다. 이날 할머니가 만든 음식들도 모두 직접 키워 수확한 야채로 만든 것들이었다.

여름 야채라고 하면 역시 열무다. 할머니는 날이 가문 탓에 노지 대신 하우스에서 키운 열무로 전날 미리 김치를 담가두었다. 열무김치 담그는 건 어렵지 않다. 소금에 절여 숨이 죽은 열무에 말린 고추, 양파, 마늘, 찰밥을 섞어 간 양념을 넣고 버무리면 끝이다. 하루가 지난 다음 먹는 이 열무김치는 찹쌀풀 대신 넣은 찰밥 덕분에 개운한 맛이 난다. 물김치로 담글 때에는 찹쌀풀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강하게 쏘는 맛보다는 순하게 입에 감기는 맛을 좋아하는 할머니는 비빔국수 양념장도 색다르게 만든다. 열무비빔국수 양념장은 보통 고추장을 쓰지만 “문득 이렇게 먹으면 괜찮겠다 싶어” 만들어봤다는 할머니 양념장은 간장이 기본이어서 맵지 않고 약간 단맛이 난다. 간장 한 사발에 고추장과 고춧가루, 참기름을 한 큰술씩 넣고 다진 청양고추와 양파를 넣어 만든다.

찬물에 헹군 국수와 야채 고명, 열무김치, 양념장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래마을 옛집에서 쓰는 유기에 가지나물과 양파김치, 오이냉국을 담아 국수에 곁들이니 정갈한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밥상 주변에 둘러앉은 도래마을 옛집 식구들은 늘 먹는 음식인데도 맛있다고 감탄하며 함께 가꾼 야채 자랑에 신이 났다. 요즘은 가지와 토마토와 열무가 제철이고, 양파가 좋아서 무슨 음식을 만들든 양파를 듬뿍듬뿍 넣는다. 종자가 다른 것도 아니고 늦게 수확한 것도 아닌데 오이와 고추가 어찌나 크게 자라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무도 모를 이유로 팔뚝만 하게 자란 오이로는 냉국을 만들었다. 채 썬 오이에 소금과 식초, 매실액을 넣고 조물조물한 다음 냉수를 붓고 채 썬 양파와 붉은 고추를 넣는 것이 전부인 단순한 오이냉국이다. 씹히는 데라고는 없이 부드러운 가지나물도 허무하리만치 간단하다. 반으로 길게 가른 가지를 찐 다음 손으로 찢고 꼭 짜서 간장, 고추장, 다진 파와 마늘,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무치면 된다. 할머니는 “나물은 참기름을 듬뿍 넣어야 맛”이라며 참기름을 아끼지 말라고 강조했다. 아삭한 맛을 원한다면 볶는 법이 있다. 납작하게 썰어서 소금물로 씻은 생가지에 양파와 고추, 마늘을 넣고 볶다가 소금으로 간을 하면 된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도래마을 옛집에서 일하는 할머니는 벌써 4년째 할아버지를 집에 두고 ‘사회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런 자유를 얻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유독 엄격했던 할머니의 아버지는 둘째 딸이자 막내딸인 할머니가 연애라도 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기세였다고 한다. 그럼 언니도 중매결혼이었겠다고 묻자 문득 할머니의 표정이 억울해진다. “우리 언니는 동네 살던 총각 하나가 일찌감치 찍어가지고… 언니가 그렇게 연애해서 결혼하니까 그다음엔 오빠들까지 나를 잡더라고.”

중매로 만난 총각에게 시집가면서 이제 좀 놀러다니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남편도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양반 체면 고집하는 답답한 남자여서 그랬다고 하지만, 열두 살이나 어린 새색시가 오죽 예뻤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특별히 도래마을 옛집 근무를 허락한 것은 우리 문화유산을 돌본다는 자부심 덕분이었다. 요즈음 할머니는 일하는 재미, 서울과 부산으로 시집간 세 딸에게 싱싱한 야채 보내는 재미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할머니는 이제 도래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동아정과 전수자이기도 하다. 호박 비슷한 야채인 동아를 물엿에 다린 정과로 만드는 동아정과는 도래마을에 살던 할머니 큰댁의 집안 어른이 백 년 전쯤 고안한 음식이다. 만드는 법을 물으니 할머니의 얼굴에 자부심이 비친다. “그거 만들기 어려운데.” 구운 꼬막 껍데기를 쌀가루처럼 곱게 빻아 동아에 골고루 묻히고, 열두 시간 재우고, 정성껏 물엿에 다려야 한다. 자칫하면 물러서 먹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할머니의 딸들이 집에 오면 가장 자주 찾는 음식은 평범한 부침개다. “장마엔 부침개가 좋잖아.” 가물었던 땅이 모처럼 비에 젖었던 날, 부추와 양파를 듬뿍 넣은 할머니의 부침개 맛을 상상해보았다.

글 김현정 기자/ 사진 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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