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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의원 “아내도 내가 북파 작전 벌인것 모른 채 세상 떠나”

이진삼 의원 “아내도 내가 북파 작전 벌인것 모른 채 세상 떠나”

marry04@seoul.co.kr 기자
입력 2011-02-11 00:00
업데이트 2011-02-1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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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74) 자유선진당 의원이 북파 작전을 수행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의 일입니다.그는 북한에서 남파됐다가 생포된 공작원 가운데 전향한 이들을 훈련시켜 함께 작전을 벌였습니다.

1967년 9월24일부터 10월14일까지 3차례에 걸쳐 황해도 개풍군에 침투해 35명의 북한군 병사를 살해했는데요. 육군사관학교를 사를 나온 엘리트 군인인 그가 목숨을 내놓은 작전을 기획하고 결심하고 실행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이 의원은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2시간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내가 알기론 육사 출신이 북파 작전을 수행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키 165cm의 왜소한 체구의 그가 어떻게 그런 담대한 침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습니다.그는 "공부에 파고들면 성적은 그런대로 나왔지만 그것보다는 군사실습 같은 것이 재미있어서 항상 3등 안팎의 성적을 유지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의원의 전공(戰功)이 보도된 것은 일요일인 지난 6일이었습니다.그는 마침 딸 부부와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자신의 무용담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봤다고 했습니다.사위와 딸이 "어떻에 된 일이냐?"고 물어 뉴스 그대로라고 했다고 하네요.2004년 세상을 떠난 부인도 이 의원의 비밀 작전을 끝내 모른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군의 기밀을 끝까지 함구했지만 지난달 24일 국회 국방위 간담회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에게 "(내가) 이북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과정에서 세간에 알려졌습니다.었던 것이 세간에 알려졌습니다.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에 대해 말로만 대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의원의 생생한 무용담이 알려지자 "후련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한편으론 남북관계가 경색된 이 상황에서 굳이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모종의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습니다.또한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86년 양순직 신민당 부총재 폭행 등 정치 테러 전력을 들어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현역 의원의 과거 전공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해 인터뷰를 청했더니 사흘만에 연락이 와서 성사됐습니다.다음은 간추린 문답.

 

Q.남북 군사 실무회담이 결렬됐는데.

A.사람을 못살게 굴어놓고 잘못했다는 한마디 없다가 다급하니까 만나자고 했는데,그러면 깨끗하게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해도 분이 풀릴까 말까 한데 이런 말 저런 말이나 빗대어서 하고 누구를 놀리 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된다.군사회담은 군인답게 해야.

 

Q.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A.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왔다.이번에 군사회담, 우리 후배들 잘 하고 있는 거다.그들과 대화 는 외교부나 통일부가 하고 군대는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

 

Q.1967년 북파해 북한군 35명을 살해했다는 보도 이후 주변의 반응은.

A.이진삼 성격 알기 때문에 “(북파 작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내가 얘기를 하지 않아 (다른 이들은) 몰랐다.

 

Q.북파 작전을 지금 평가하면

A.내 할 일 했을 뿐이다.군인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생명을 요구받는 때이다.내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 바칠 것은 목숨 뿐이다.

 

Q.북파 작전으로 1968년 1월 김신조 청와대 침투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닌가.

A.(1967년) 9,10월에 (작전을) 한 뒤로 (북한의 도발이) 조금 조용했다.그러다 몇 달 후 청와대 습 격을 했는데 이 습격은 1년 전부터 계획한 것이었더라.

 

Q.당시의 북파 작전이 박정희 정권 등 상층부의 지시에 의한 것은 아니었나?

A.미국이 지금은 대간첩 작전을 우리한테 맡기고 있지만 당시는 크게 (남북이) 붙으면 전쟁이 일어 날 것 같으니 전쟁 억지 차원에서 미군이 나와 있었다.당시는 (북에서 내려오는 간첩을) 잡는 데 신 경을 썼지 보복을 할 수 없었다.

 

Q.당시 북한의 도발이 많았던 이유는?

A.새마을 사업이다 뭐다 하니까 배가 아파서 남한을 (혼란시키려고) 한 것이다.소극적으로 (간첩을) 잡기만 했지 (응징하러) 올라가지는 않았다.올라갈 역량도 없었다.당시는 유사시에는 핵 때려서 전 쟁 끝내겠다는 시대였다.

 

Q.결국 (북파 작전을) 단독으로 기획하고 결심하고 실행한 것인가.

A.(그렇다)

 

Q.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군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나

A.한심하지.내가 참모총장을 할 때는 백배,천배 응징하라고 했다.왜 군대가 이 모양이 됐나 울분을 토했다.

 

Q.그러면 어떻게 북에 대응해야 했었나

A.비대칭 전력이 있다.공군력이 북한보다 강한데,백령도 맞은편 (북한) 포진지 타격했어야 했다.북 한이 기습도발하면 했지 이쪽에서 준비해서 (응징)할 때는 (전면전) 하지 않는다,그게 전쟁 원칙이 다.

 

Q.북파 작전 때 35명을 살해했는데 사체는 모두 확인했나.

A.뻔히 보이는데 확인했다.

 

서울신문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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