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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호킹’ 신형진씨 모친 인터뷰 2 - 미군 군용기로 귀국하기까지

‘연세대 호킹’ 신형진씨 모친 인터뷰 2 - 미군 군용기로 귀국하기까지

jin@seoul.co.kr 기자
입력 2011-03-04 00:00
업데이트 2011-03-0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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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3. 중고교 생활,숱한 고비,대학 진학



(계속)

대학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한숨을 푹 쉬면서) 형진이가 대학교 1학년 때, 2002년 8월 태국에 열흘 정도 갔었는데 이때 몸은 불편하지만 여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엄마만 고생하면 형진이도 세상구경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저희 어머니 생신 때문에 미국에 간 적이 있어요. 2004년 7월 8일 도착했는데 지금도 기억해요. 7월 9일 또 호흡이 끊어지고 동공 열리고. 몇 분만에 돌아오긴 왔는데 우리가 간 미국 병원이 너무 작은 데라서 형진이 같은 애 감당하기엔 시설과 의료진이 적당하지 않았어요. 거기에 두 달 있는데 서울 올 길이 없더라구요(형진씨가 아프기 때문에 쉽게 이동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친구 한 사람이 생각나 전화했어요. 친구 남편이 당시 열린우리당 유재건 의원이었는데 길이 없나 알아봐 달라 했어요. 하루 있다가 전화 왔는데 (유 의원이) 그 당시 국방위원장이었어요. 그분이 미8군 사령부한테 전화해 이 학생이 이렇게 됐는데 데려올 방법 없냐고 했더니 그 장군이 듣자마자 내가 꼭 책임지고 도와주겠다 하더라구요. 어떻게 이런 길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사령관이면 별 4개 아니겠어요.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도 ‘그렇게 좋은 일 하면서 나한테 물어볼 필요 있냐. 의회에서 뭐라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내가 그 경비 내겠다’ 라고 말했다고 했어요.

 

무척 고마웠겠네요.

-미국에 세금 낸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나도 남을 위해서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형진이처럼 아픈 얘들을 위해 강남세브란스병원에 기부하는 게 그래요. 강남 세브란스병원에서 자가재활호흡방법을 통해 서서히 나았어요. 2006년 8월 24일 퇴원했어요. 그날은 우리 가족만의 광복절이에요. 긴 악몽꾼 것처럼 다가왔어요. 그 잃어버린 2년의 시간이. 그래서 매해 그 날마다 1년 동안 기부금 준비해서 근육병 호흡재활샌터에 기부해요(이씨는 2006년부터 매해 5000만원 이상 혹은 1억원 정도 기부하고 있다).

 

아드님 대학 성적이 좋던데.

-대학만 9년 다녔어요. 컴퓨터 양쪽에 적외선 센서 카메라가 있고 형진이 눈에 적외선 빔을 쏘는 삼각구도가 이뤄져 있어요. 눈동자 움직이면 커서가 눈을 깜빡하면 클릭되는 거예요. 이 컴퓨터를 사기 위해 제품을 만드는 미국 회사에다가 이 영어 실력(본인은 영어 못한다고 함)으로 편지까지 썼어요. 일본 대리점에 있다고 해서 형진이 아버지가 일본까지 가서 2003년 사 가지고 왔어요. 이후부터는 날개가 달린 거죠.그때부터 나는 까만 보조의자에 앉아서 형진이가 원하는 대로 클릭하기 바빴어요. 신촌 학교에 갔다 와서 파김치됐는데 외투 벗자마자 공부하고 싶어 하는 형진이 위해서 원하는 대로 클릭하고 또 클릭하고. 15분만 하면 졸리는데 형진이가 ‘올라가, 내려가, 옆으로 가’ 지시할 때마다 클릭하는데 피곤하고 졸려서 감옥에 있는 것 같았어요. 현관문을 보면서 누가 나 대신 클릭 해줄 사람 오지 않나 계속 보기도 하고요(이씨는 인터뷰 시작 후 처음 웃었다).

 

키우면서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숨 못 쉬는 모습 보는 거였어요. 공부하고 싶어 하는 데 대학교는 학문의 깊이가 다르지 않나요. 초등학교 때 놀고 중·고등학교 때 공부 좀하고 대학 때 수학 부전공 등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미국 가서 고생하고 많이 약해졌는데. 자기 기능 살리는 물리치료 받으면서?. 근육병 자녀 키우는 엄마들도 숨 못쉬는 것 같아요. 잠시도 마음을 놓고 안심할 수 없잖아요. 남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다른 근육병 앓고 있는 남자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엄마는 좋겠다. 숨 편하게 쉴 수 있어서.”

파일 4. 미국에서 폐렴 걸려 사경, 미군 도움 받은 사연



 

정부나 사회에 원망은 없었나요.

-보건복지부에서 활동보조인 둘 수 있도록 했어요. 작년 2학기 활동보조인하고 같이 다녔죠. 엄마가 나이들면서 힘 빠지고 혼자 형진이를 들고 다니는 게 힘들더라고요. 또 형진이가 책을 읽으려면 누군가 넘겨줘야 하고요. 그 제도가 생긴 지 3년 된 듯한데 그런 제도를 둔 정부에 너무 고맙더라고요. 다만 조금 늦게 그런 제도를 알았죠. 사랑의 빚이 너무 많아요. (학교 졸업하면서 느낀 점은) 교수님들이든 모두가 보석을 만들어 준 것 같아요. 과연 졸업할 수 있을까. 굉장히 멀게 느껴졌는데, 자신도 없어지고 먼나라같이 느껴졌는데 현실적으로 딱 이뤄지고. 그때부터 감사할 대상이 너무 많죠. 빚이 너무 많고. 그 빚을 갚아야 하죠.

 

졸업했으니 취업은요.

-두세 군데에서 오라고 선배한테 들었는데 형진이가 대답 안 하고 있어요. 당분간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겠다고 했어요. 맞는 말이에요. 급하게 서둘러 취업할 필요 없고. 컴퓨터 과학 평생할 것 같으니까(이 부분에서 형진씨는 어머니를 불러 기사화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천천히 생각해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항간에 형진이가 마이크로 소프트에서 제의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도는데 그런 일 없어요. 오보예요.

 

장애인이라 취업하기 쉽진 않을 텐데요.

-벌금을 내더라도 안 뽑아요. 기업 입장에서는 얼마나 생산성이있을지 잘 모르니까. 미국에서는 그런 일 없는데 아무리 돈이 들어도 편의시설 다 해주는데 우리나라는 아니에요. 연대 나온 선배들이 조언해주고 이래저래 기회가 올 것 같아요. 제안이 전혀 없다고 하면 선배들과 의논해 보지 않겠어요. 선배들이 이런 말 하더라고요. 돈을 벌지 않더라도 나라에서 하는 일들 중에 연구원이나 팀 일원으로 형진이가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요. 5년이 걸려도 10년이 걸려도 되는 프로젝트 그걸 해보는 게 어떠냐고. 생각 이죠.

파일 5. 정부에 하고 싶은 말, 앞으로 계획



 

형진씨가 돈 벌어서 한 일이 있다면서요.

-2008년 작은 벤처회사에서 일하는 한 선배가 컴퓨터로 주문대로 만들어서 보내는 일을 형진이한테 시켰어요. 참, 형진이 별명이 뭔지 아세요. 4000원이에요(이씨와 도우미 아주머니, 기자 모두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그 선배가 미국에서는 시급이 8000원이라며 괜찮겠냐고 하는데 형진이가 ‘전 4000원이면 됩니다.’ 그랬어요.

 

형진씨한테는 엄마 이상일것 같은데.

-(이씨가 형진씨 쪽을 바라보며) 형진아 너는 비싼 인력 쓴다. 돈 10원도 안 주고 (또 웃음이 터졌다). 기사 노릇, 간병인 노릇, 비서 노릇, 책 빌려와라, 반납해라, 교수님한테 가서 이 말해라, 저 말해라, 물어봐라 등등등 온갖 할 일이 많아요. 이런 비서가 어디에 있어요. 형진이가 언제 숨이 끊길지 모르니까 정기적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까 30, 40년을 놀아본 적이 없어요. 나이는 먹어서 놀 기운도 없고. 놀고 싶지도 않고. 지금은 바쁜 것만 정리되면 첫째는 영어 공부와 둘째는 헬스를 하고 싶어요. 형진이 휠체어 미는데 눕는 휠체어잖아요. 그래서 내가 허리를 구부리고 다녀야 하니까 허리가 너무 아파요. 졸업식 영상 보니까 제 허리가 많이 굽었더라고요.

 

좋은 계획 있나요.

-특별히 어떻게 살아야겠다, 명쾌하게 그대로 되진 않아요. 내 삶이 다음주 금요일에 뭘 하겠다는 약속 못해요. 이유는 형진이 컨디션 안 좋으면 약속 취소하고 형진이를 지키고 봐야 하니까. (지친 표정으로) 소원은 형진이 치료제 근육병 치료제가 없으니?. 어디선가 연구하겠지요.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빨리 약이 나오라 기도하고 있어요. 내 아이만 좋아지는 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근육병 있는 애들 좋아지지 않겠어요. 백혈병 약 없었는데 개발된 것처럼 이제는 근육병도 치료제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서울신문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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