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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칸방에서 외치는 “중국 대륙 민주화” 우쩐롱 선생의 10년 세월

단칸방에서 외치는 “중국 대륙 민주화” 우쩐롱 선생의 10년 세월

입력 2011-09-16 00:00
업데이트 2011-09-1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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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밤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된 ‘TV 쏙 서울신문’이 지난 2002년 한국에 밀입국해 2008년 불법체류 중국인으로는 처음 난민 인정을 받은 우쩐롱(武振榮·62)씨가 살고 있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한 쪽방을 찾았습니다. 3㎡가 채 안될 것 같은 쪽방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글이 인터넷을 타고 대륙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칸방에서 혼자 지내는 보잘 것 없는 중년이라 여기기 쉽지만 중국의 민주화운동 인사들 사이에선 류샤오보 못지 않은 존경과 예우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엔진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입력하니 엄청나게 많은 글이 떠오릅니다.

 

그는 한국에 온 경위에 대해 “2002년 6월 14일 홍콩의 한 출판사에 편지를 보냈다. 그 안에는 내가 쓴 책 ‘66운동 논설’을 발간하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다. 결국 출판사는 편지를 받지 못했고, 공안이 그 편지의 복사본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때 난 두려움을 느껴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한국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은 민주화 국가다. 한국 민주화의 경험은 당시 나를 포함해 중국의 많은 청년들을 매료시켰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김대중 전기를 읽고 연구했다. 김영삼에 관한 전기도 읽었다. 그래서 한국을 선택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인민해방군에서 정치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집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을 책으로 엮으면 30권, 글자로는 800만자에 이른다고 합니다. 동·서양의 고전을 아우르며 중국에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글들입니다. 우씨는 이 책들 가운데 3권밖에 한국에 가져오지 못했고, 나머지 27권은 중국에 남아있습니다.

 

우 선생 혼자 누울 만한 공간에서 일어서더니 다락방 문을 열어 어렵사리 짐을 꺼냈습니다. 공안을 피해 흙 속에 묻어두었다가 꺼내온 것으로, 문화대혁명을 자신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책입니다.

 

그는 한국에 온 뒤 중국민주화운동 해외연석회의라는 단체의 한국 지부장을 맡았습니다. 2002년 2명에 불과했던 한국지부는 한때 120명으로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천안문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6월 4일마다 중국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중국 당국이 민주화운동 인사를 탄압할 때마다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물결이 도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난해 중국에서는 ‘모리화(재스민) 혁명’이란 싹이 틔웠지만 꽃을 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씨는 중동의 물결이 언젠가는 중국에도 흘러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중동 재스민 혁명의 영향 아래 중국에서도 여러 방면에서 민주화 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중국은 이 민주화 운동을 전력을 다해 억눌렀다. 지금까지 계속 억눌러 왔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난 이것만은 굳게 믿는다. 올해는 억누를 수 있어도 내년에는 억누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언젠가는 중국에도 민주화운동이 폭발하듯 일어날 것이다.”

 

중국판 트위터로 불리는 ‘시나 웨이보’ 가입자가 2억명을 돌파했습니다. 웨이보 이용자들은 지난 7월 중국 윈저우 고속철 참사 당시 정부가 구조 작업을 서둘러 종결하려던 사실을 비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국 당국은 웨이보를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쩐롱 선생은 “인터넷은 새로운 매체다. 공산당은 방송과 라디오는 통제할 수 있지만 인터넷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전세계의 평등과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을 타고 중국으로 퍼지고 있다. 나는 미래의 중국 민주화 운동은 반드시 인터넷에서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고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륙의 민주화를 외치는 그의 살림살이는 너무도 척박해 보였습니다. 1970, 80년대 공장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이 드나들었을 쪽방촌 거리는 일자리를 구하거나 비자를 구하는 중국인들로 대낮인데도 붐볐습니다. 근처 공장에서 새나오는 악취는 쪽방촌의 생활 냄새와 겹쳐져 두통을 일으킬 정도였고 정말 좁아터진 부엌에서 어떻게 1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뎠는지 의아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연하게 괜찮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활은 정말 어렵다. 40만원으로 한 달을 생활하고 있다. 방세, 전기세, 인터넷 비용 등?. 더욱이 난 나이도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즐겁다. 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내가 쓴 글의 단 한 글자도 발표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 온 뒤로 500여편의 글을 발표했다.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서예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어 자유롭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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