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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의 ‘빨간펜’ 스승, 이수열 국어순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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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기자라면 한번쯤 이 분의 편지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편지 봉투에 호기심이 일다가, 그 속에 빨간 펜으로 빼곡히 뭔가가 적힌 신문기사 조각에 적잖이 당황하기 마련. 잘못 쓴 우리말과 글 표현을 바로잡은 내용들이다. 565돌 한글날이 다가오니 문득 그 분이 떠올랐다. 이수열(83) 솔애울국어순화연구소장이다.

8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된 ‘TV 쏙 서울신문’ 취재진이 지난 4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이 소장을 만났다. 움직임이 다소 힘겨워 보인다. 최근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탓이다. 인터뷰 도중 피곤한 듯 눈을 질끈 감고,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면서도 기자 질문에 하나라도 더 일러주고 싶은 마음에 자료를 들추고, 책갈피를 넘겼다.

“예전에는 새벽 서너시에 일어났는데, 요즘은 6시에나 일어나요. 방송을 보고, 신문을 읽고?. 난 신문 보는 목적이 다른 사람보다 하나 더 있는 셈이잖아, 이런 거 고쳐 보내는 거.”

 

신문 기고문 몇 장과 두툼한 국어대사전 등이 놓인 책상에 앉아 돋보기 안경을 쓴 채로 빨간펜으로 차근차근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모습. 20여년을 변함없이 이어왔다.

 

“1980년대 말에 어렵사리 창간한 신문을 읽어보니 꽤 내용이 괜찮더라고. 그런데 보면 볼수록 틀린 표현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고쳐 보내주기 시작했죠.” 그가 기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계기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신문에 정기적으로 투고하는 대학교수들의 글에 ‘빨간펜’을 댔다. 교수 한 사람이 바뀌면 그가 가르치는 많은 제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 싶었다. 또 외국에서 공부해 영어와 일본어 어투와 습관이 많이 녹아 있어 더욱 필사적으로 바로잡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한 대학교수는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내가 너무 형식주의에 얽매어 있고, 너무 짜대, 소금처럼. 시대에 따라 말도 변할 수 있는데 말이지. 그러면서 자신도 변하고 있대. 그러더니 내가 우리말의 소금이라고, 소금은 역시 짜야 제맛이라나.”

 

껄껄 웃는 모습에서 수고로움을 인정 받은 기쁨과 변화를 이끈 보람이 함께 담긴 듯했다.

이 소장은 1928년 경기도 파주시 송라동에서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봉일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교원자격 시험에 합격해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중등교사 검정시험을 치러 서울·경기 지역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다 1993년 서울여고에서 정년퇴직했다.

 

곧바로 집필에 몰두했다. 1994년에 낸 첫 책 ‘우리말 우리글 바로 알고 바로 쓰기’는, 고(故) 이오덕 선생의 ‘우리 글 바로쓰기’와 더불어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서적이다. 이후 ‘우리말 바로 쓰기’,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를 줄줄이 냈다. 일본식 표현으로 가득한 헌법을 우리말로 고쳐 쓴 ’대한민국 헌법’도 출간했다.

틀린 표현을 몇 개 지적해 달라고 하니 술술 나온다.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입장’이라는 단어를 빼면 말을 못해. 그건 그냥 ‘처지’거든. 그런데 견해, 주장, 원칙, 그런 걸 전부 입장이라고 말한다고.”

 

행사를 ‘연다’고 하면 될 것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나, ‘교육한다’를 ‘교육시킨다’는 식으로 영어 번역투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관형격 조사 ‘의’를 남발하는 것도 불만이다. 개화기 때 일본 말 ‘의(の)’를 사용하면서 지식인인양 했던 풍속이 우리말을 어지럽힌 결과란 것이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사고방식도 제대로 서지 않는다.”

 

그의 신념이다.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요즘 세태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얼마 전 한 외국인 교수가 ‘영어 오남용 너무 심하다’라고 쓴 칼럼을 읽고 한평생 한글 순화운동을 해온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했다.

“일제시대에서 할 수 없이 일본말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왜 자진해서 영어를 하느냐는 말이야. 스스로 언어 종속, 종살이를 하는 거예요. 요즘은 기자들도 영어를 마구 써댄다고. 그러니 내가 이 일을 쉴 수가 있나. 하는 데까지 해야지.”

그와 만나 얘기를 나눈 2시간은, 인터뷰라기보다 밀도 있는 한글 수업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인터뷰 기사를 잘 쓸까.‘가 아닌, 다른 생각이 맴돈다. ‘빨간 글씨가 가득하더라도 선생의 편지를 계속 받고 싶다.’는,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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