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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본 수집 박균호 교사 “불이 나 3000권 중 한 권만 들고 나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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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의 유통기한은 요구르트보다 짧다고 했던가.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세상에 나와 독자의 선택을 기다리다 절판으로 그 몫을 다한다. 베스트셀러나 작가의 이름값에 미혹돼

서가(書架)의 먼지만 뒤집어쓰다 버려지는 책들이 있는가하면 독자가 진가를 알아보기도 전에 출판사의 절판 처분을 받는 책도 부지기수다.

책들의 저수지(reservoir)에서 진귀한 책, 절판된 책들을 건져내는 손맛이 궁금했다.

15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된 ‘TV 쏙 서울신문’은 경북 상주의 한 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박균호(43) 교사의 김천시 부곡동 아파트를 찾았다. 가장 넓은 방의 양쪽 벽이 책장 차지였다. 가로 여덟 칸, 세로 일곱 칸에 빈틈없이 꽂힌 책들의 무게를 못 견뎌 시렁 바닥이 활처럼 휘어져 2~3년마다 한 번씩 뒤집어주곤 한단다. 시렁의 앞쪽 공간에 어김없이 2중, 3중 ‘주차’된 책도 적지 않았다. 창가에 놓인 책상 아래 공간에도 책들이 빼곡하다. 초등학교 4학년 딸도 밥을 먹으면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신기하게도 본인을 빼닮았다고 흔감해 하는 박 교사와의 일문일답.

→언제부터 책을 모은 건가.

-영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1987년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교편을 잡으면서였다.

→25년 동안 3000권을 모았다는데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기회 있을 때마다 주위에 나눠주기 때문이다. 집에서 차로 30분 걸리는 학교 안 여러 공간에 책들을 나눠 보관하고 있다. 집이 계속 (책들 때문에) 좁아진다.

→지금까지 주위에 나눠준 책들이 얼마나 되나.

-헤아릴 수 없다. 인터넷 독서 커뮤니티에도 난, 양보심 많은 이로 알려져 있다. 해서 지금도 여기저기서 책 달라는 이메일과 편지를 받는다.

→절판본, 희귀본에 눈 돌리게 된 계기는.

-1995년에 ‘숨어사는 외톨박이’(1977, 뿌리깊은나무)‘란 책과 마주하면서였다. 내용이 너무 좋아 주위에 선물하려 했는데 절판됐다고 했다. 구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간단치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책을 구하게 되면서 지독한 새책주의자였던, 전 주인의 메모나 밑줄을 끔찍히 싫어했던 내가 전 주인의 흔적마저 사랑하게 됐다.

박 교사는 최근에 낸 ‘오래된 새책’(바이북스)에 ‘3000권의 책 중에서 단 한 권만 제외하고 모두 버려야 한다면, 집에 불이 나서 단 한 권만 들고 집을 빠져나와야 한다면, (중략) 내 인생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 단 한 권의 책으로 아부를 해야 한다면, 내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고마운 이에게 책으로 답례를 해야 한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책을 선택할 것’이라고 적었다.

→책은 어떻게 구하나.

-독서 커뮤니티에 올라온 추천글을 많이 참조한다. 세상에 너무 많은 책들이 있어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또 그 명성이 실제로 가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해서 휘귀본과 절판본을 구하는 이들은 소장 가치가 높다는 책이 나오면 일단 손에 넣고 본다. 다른 사람이 추천한 책 속에서 다른 책 정보를 얻거나 실마리를 찾는 경우도 많다. 소문과 평판만 좇아 책을 손에 넣었다가 나중에 화가 나고 짜증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렇게 절판본을 구하는 이들끼리 만나거나 하나.

-책에도 썼지만 무림의 고수들이 널려 있다. 최종규씨 같은 분은 정말 365일을 헌책방에서 지내며 책도 많이 썼다. 순 한글로만 쓴 책이 있을 정도다. 책을 구하다 보면 이런 마니아끼리 서로 통하고 정보를 교류하고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한번도 얼굴을 맞대지는 않고, 그 흔한 오프라인 만남 같은 것도 꺼린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론이 있다면.

-좋은 책은 언젠가 다시 출간돼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 절판돼 세상 사람에게 잊혀지는 것도, 또 재출간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 독자 몫이다.

또 하나, 책은 가장 필요로 하는 이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다. 순전히 소장 욕심에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책이라도 정말 간절히 원하는 이가 있다면 양보하곤 한다. 최근에 낸 책이 몇몇 언론에 소개됐는데 ‘헌책 사냥꾼’이란 오해를 사겠구나 싶었다. 난 책을 사랑하다가 절판본의 가치에 눈 뜬 사람에 불과하다. 돈을 벌거나 할 목적이 아니란 점을 꼭 얘기하고 싶다.

→책 구하면서 가장 고생했던 경험은.

-고(故) 이윤기의 소설 ‘하늘의 문’(1994, 열린책들)은 세 권짜리인데 독서 커뮤니티에 책 구한다는 글 남겨놓고, 유명 고서점 주인들에게 책이 들어오면 내게 가장 먼저 연락해달라고 부탁하고 이도저도 안돼 값을 후하게 치르겠다고 약속하는 등 갖은 방법을 썼다. 둘째 권을 구입한 지 거의 1년 만에 나머지 1, 3권을 손에 넣었는데 책들을 손에 쥐는 순간마다 전율과 행복감에 짜릿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천으로 향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래 질문과 ‘이 책들 다 읽어봤느냐.’였는데아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소장한 책 가운데 가장 비싼 값을 치른 것은.

-독일 사진작가 피터 스텔라의 ‘SPECTRA’다. 책 수집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야구(실제로 거의 매일 프로야구를 본다 했다. 서재 곳곳에 메이저리그 스타들의 인형 20여개가 자리하고 있었다.)이고, 그 다음으로 사진인데 이 책은 가로 40㎝, 세로 50㎝로 웬만한 책 여섯 권으로도 못 가릴 정도다. 무게는 8㎏으로 혼자 들기도 버거울 정도.

미국의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나왔길래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시리즈로 유명한 앤셀 애덤스의 흑백 사진을 컬러로 ‘컨버스’한 것인줄 알고 앞뒤 가리지 않고 주문부터 했다. 배송비까지 수십만원쯤 들었다. 나중에 사과상자만한 박스로 배송됐는데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책장을 들춰보니 애덤스의 사진보다 훨씬 빼어난 풍광들로 눈이 호사를 누려 정말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다른 이에게 선물할까 싶어 이베이를 뒤졌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타산을 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질 작품집이라고 여긴다.

→소장하고 있는 진귀한 책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책은.

-뿌리깊은나무 이전에도 전통문화와 숨은 장인들에 대한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문화재란 말을 처음 썼던 예용해 선생의 ‘인간문화재’(1963, 어문각)는 당시 책으로는 드물게 두터운 케이스가 따로 있고 특히 커버를 삼베로 일일이 붙여 만든 정성이 갸륵하다. 세로쓰기에 흑백사진들이지만 속지는 당시로선 최고급이었고 정성을 들인 출판이 어떤 것인지 진수를 보여준다.

→계속  

절판본 수집 박균호 교사 “귀중한 책 절판도 재출간도 모두 독자의 몫”

←계속

기자가 케이스에서 책을 꺼내다 케이스 밑쪽이 조금 훼손됐지만 박 교사는 개의치 않았다. 기자 나이와 같은 세월을 견딘 책이라 삼베에 얼룩이 적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의외로 깨끗했다. 책장을 넘겨보니 장인들이 쓰는 장비나 전문용어 등에 대한 설명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예용해 선생의 책 ‘이바구저바구’ 마지막 쪽에 남겨진 메모가 돋보이더라.

-책을 꽤 꼼꼼히 읽어봤다. 헌책방 주인에게 꽤 비싼 값을 치렀는데 그런 메모를 발견했다. ‘79.10.20 범식이가/읽고 빌려줘’라고 적혔는데 아마 책을 산 이가 친구에게 선물하면서 남긴 것으로 보인다. 헌책을 넘기다보면 이런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통해 책이 맺어준 사람들의 관계를 깨닫고 훈훈해지곤 한다.

→그런 책으로 권정생 선생의 책도 빠뜨릴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과 이오덕 선생이 생전에 나눈 정겨운 편지글을 담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2003, 한길사)는 이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주중식 당시 거창 샛별초등학교 교장이 출판사에 제의해 권 선생과 충분히 협의하지 않은 채로 출간됐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권 선생이 편지에 등장하는 이웃들이 마뜩치 않아 할 것이라며 배포하지 말아달라고 해 서점에 깔린 그날, 곧바로 회수됐다. 어렵게 낸 책을 이런 사소한 이유로 물르자고 했다는 것도 놀랍고 또 출판사가 곧바로 회수한 것도 다 요즘 보기 드문 일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을 구한다는 얘기를 독서 커뮤니티에 올린 지 3년 만에 어느 소장가가 연락을 해와 손에 넣었다. 엉겁결에 난, ‘더 귀한 책은 없느냐.’고 되물었는데 그의 답이 ‘글쎄요. 저희 집은 잠자는 공간 빼고는 모두 책이라서요.’였다. 난 갈급을 느낄 때마다 귀한 책의 행방을 그에게 물었는데 어느 날, 풀 죽은 목소리로 ‘갖고 있는 모든 책을 팔아버렸다.’고 했다. 자의든 타의든, 책 수집가의 운명은 모두 언젠가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독서 커뮤니티에 어느 날 갑자기 좋고 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그런 때 우리끼리 ‘또 한 분의 애서가가 돌아가셨구나.’ 한다. 책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아무렇게나 처분하는 것이다. 난 아무 쓸모나 가치도 모르는 이의 손에 내 귀한 책들이 쥐어지는 것을 끔찍한 일이라 여긴다. 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많이 나누려 하는 것이다.

→‘도끼(러시아 작가 도스또예프스키를 독서 커뮤니티에서 부르는 별칭) 전집’(2000, 열린책들) 재출간도 독자의 힘에 굴복한 것 맞죠.

-확증은 없고, 그런 말들이 많았다. 열린책들에서 2000년에 푸른색 양장본으로 25권을 냈는데 열악한 출판 상황에서 난해한 러시아 문학 전집을 완간한다는 게 보통 용기가 아니었다. 더욱이 영어와 일본어로 중역(重譯)하지 않고 러시아어로 완역한 데 대해 독서계에 대단한 흥분이 일었다.

그런데 초판본은 몇 군데 번역 오류와 마지막 25권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마지막 한 페이지가 번역자 실수로 빠진 채 출간돼 리콜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빨갱이 도끼’ 버전이었다. 오류도 바로잡고 손에 들고 다니기 쉽게 판형을 축소했는데 네덜란드 화가 에이드리안 뭉크의 작품을 절묘하게 18권의 표지에 담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붉은색 표지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여졌다.

그러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빠른 시간에 절판되자 열렬 독자들이 재출간을 촉구하는 글을 출판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배했다. 한 열렬 애서가는 ‘재출간하지 않을 거면 아예 내게 판권을 넘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책 좋아하는 이들이 출판사에 전화 걸어 당장 책을 내라고 윽박지르는 일이 그렇게 희귀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재생지로 만들어 두툼한 페이퍼북 버전이 나왔다. 또 그 뒤에 수집가용 210부 한정판이 나왔는데 비싼 값을 치루고 이를 구입한 이들은 표지가 구겨지고 색이 바랬다든지, 제본이 불량한 흠결이 드러나 또 다시 항의하곤 했다.

이런 예를 볼 때 좋은 책을 절판시키는 것도, 절판된 책을 다시 살려내는 것도 모두 독자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구하러 서울 청계천이나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를 많이 찾겠다.

-가끔 대구 대현동의 중고서점 ‘합동북’을 찾긴 하지만 워낙 시골에 사는지라 자주 가지 못한다. 인터넷 중고서점을 활용하는 편이다. 왔다갔다 하는 비용과 시간의 낭비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난 매일 그러지는 못하는데 매일 50여곳의 인터넷 중고서점을 모두 둘러보는 마니아도 있다. 그런 이에겐 못 당한다.

서울 종로 2가에 ‘알라딘’이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목적의식적으로 귀한 책들을 비싼 값에 사들인다는 얘기도 나오더라. 다 계획이 있어 그럴 것이라고 본다.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는, 젊은 친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학교에 취직하고부터 오마이뉴스 등에 글을 써오며 갈급증을 해소했다.

우연히 콜럼버스가 그렇게 대단한 위인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취지의 글을 썼는데 출판사 편집자가 연락을 해왔다. 위인들의 이면을 들춰보는 책을 내보겠다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수락하고 막상 집필에 착수해보니 전문가도 아니어서 힘겨웠다. 그래서 가장 잘 아는 게 책이니 책 얘기를 써보자고 해서 쓰게 됐다. 올해 1월 원고를 넘겼는데 출판사 사정으로 미뤄지다 지난달 나왔다.

→앞으로 계획은.

-소장하고 있는 책 수를 200권 정도로 줄이는 것이다. 명성에 휘둘려, 소문에 내몰려 책을 사고는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내가 미쳤지, 저 책을 왜 샀나.’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름만 대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1급 작가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서가에 그런 책들이 꽂혀 있는 걸 보면 마구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곤 한다.

누군가 좋아하는 책 200권을 놓고 한 권 새로 추가할 때마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책 한권을 빼는 식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넓은 방을 서재로 양보한 아내 얼굴 보기도 그렇고, 좋은 책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이에게 가야 한다는 지론대로 남들에게 다 나눠주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200권을 늘 유지하려고 한다.

아울러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좋은 책 고르는 능력을 갖추도록 길라잡이하는 책을 써보고 싶다.

김천 글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사진 문성호PD sung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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