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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 별세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 별세

입력 2011-12-30 00:00
업데이트 2011-12-3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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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독재의 서슬 퍼런 고문도 견뎌냈던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병마와 싸우다 끝내 쓰러졌다.

뇌정맥혈전증으로 29일 세상을 떠난 김 상임고문은 유난히 ‘희망’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틈만 나면 ‘인간의 가치는 희망의 질량으로 결정된다’고 말하곤 했다. ‘희망의 근거’(1995년), ‘희망은 힘이 세다’(2001년) 등 직접 쓴 책 이름만 봐도 그렇다. 앞서 펴낸 ‘우리 가는 이 길은’, ‘열린 세상으로 향하는 가냘픈 통로에서’(1992년) 등도 따지고 보면 더 좋은 세상을 향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김 상임고문의 65년 인생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30여년에 걸친 민주화 운동, 16년간 걸었던 대중 정치인의 길. 오롯이 고난과 분노의 궤적이었다. 하지만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희망을 길어 올렸다. 그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진보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까닭이다.



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었던 민주화 투사

김 상임고문은 1960년대를 제적과 강제징집으로, 70년대는 수배와 피신으로, 80년대는 고문과 감옥 생활로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했다. 암울한 군사독재 정권은 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었던 초등학교 교장의 막내 아들, 한 평범한 청년을 민주화운동 대열의 맨앞에 세웠다.

1965년 대학에 입학한 뒤 30여년 동안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71년), 긴급조치 위반(74년) 등 수배를 되풀이했다. 체포 26회, 구류 7회, 투옥 5년 6개월. 김 상임고문은 이때를 아프게 돌아보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83년 만들어진 학생운동 최초의 공개·독자적 사회운동단체였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은 ‘민주화운동가 김근태’ 인생의 최대 정점이었다. 민청련 의장이었던 85년 8월 24일 이른바 서울대 깃발사건(민추위)의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된 뒤 그해 9월 4일부터 26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1회에 걸쳐 이근안 전 경감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 비염에 시달리고 치과 치료도 못했다.

무시무시한 고문으로 살집이 떨어져나간 발뒤꿈치의 상처 부스러기를 모아뒀다 부인(인재근씨)에게 건네, 살인적인 고문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혹독한 고문에도 민청련 기관지를 만들었던 인쇄소 이름을 끝까지 불지 않았다. 그가 투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해자였던 이 전 경감을 용서했다. 심지어 “이 전 경감은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어두웠던 군사독재의 피해자이기도 했다.”며 그에게 되레 악수를 청했다. 구속 당시 외부로 보내는 편지에 민감한 내용이 많아 검열에 걸렸을 때 항의 한 번 하지 않고 단 몇 줄이라도 고쳐서 다시 내보냈다.

흔히 ‘고뇌와 회의’, ‘부드러운 힘’ 등은 정치인 김근태를 이르는 표현이다. ‘고뇌와 회의’는 이처럼 늘 흔들리는 과정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부드러운 힘’은 원칙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였던 ‘민주화운동가 김근태’가 낳은 유산이다. 정치적으로 가깝지 않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그를 “괜히 기분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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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 현실주의자였던 ‘정치인 김근태’

현실 정치 참여를 미루던 그는 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합류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2000년 8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주자, 열린우리당 초대 원내대표, 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15대 총선부터 지역구인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세 차례 당선됐지만 18대 총선에서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에게 1200여표 차로 고배를 마셨다.

‘정치인 김근태’의 행보는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이었다. 소신과 파격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2001년 김대중 총재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범야권 인사도 중용하자고 주장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대선자금 양심고백을 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사들이 포진한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서 영리병원 도입을 막았다.

강한 소신엔 대가도 따랐다. 노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노 전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하던 2002년 여름, 그를 호출했지만 ‘정몽준과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던 노 전 대통령에게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다.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해 보자.”고 했던 분양원가 공개 논란 등에서 보듯 노 전 대통령과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국회 출입기자들이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을 수차례 수상할 정도로 지적이며 신사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정직한 이미지는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범여권 대선주자였지만 지지율은 1%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2002년 3월과 2007년 7월,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 경선을 포기해야 했다.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0월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글이다. 사실상 유언이 됐다.

생의 마지막까지 야권 통합에 주력하며 정권 교체를 꿈꿨던 그는 이제 없다. 광나루 민물 매운탕집에서 못 마시는 소주를 연거푸 들이켜며 부인을 향해 결혼해 주지 않으면 도끼 들고 쫓아가겠다던 청년 김근태는, 이제 없다.

늘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그의 ‘희망’은 고스란히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글 /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영상 /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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