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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 맞붙는 박근혜와 문재인

18대 대선 맞붙는 박근혜와 문재인

입력 2012-11-24 00:00
업데이트 2012-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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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가 23일 후보직에서 전격 사퇴하면서 내달 19일 치러지는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ㆍ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정면 승부를 펼치게 됐다.

박 후보와 문 후보는 개인적인 삶의 궤적은 물론 정치적 이념과 지향점이 극명하게 다른 후보라는 점에서 두 후보간 진검 승부는 역대 어느 대선 못지않게 유권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박 후보를 말할 때는 선친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 후보를 언급할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각각 빼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대선은 ‘박근혜-문재인’ 대결 외에 ‘박정희-노무현’ 구도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근혜 후보 = 박 후보는 5ㆍ16 군사쿠데타 발발 2년 뒤인 1963년 아버지 박정희가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에 들어가 ‘영애’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박 후보는 1974년 8월15일 어머니의 서거 소식에 프랑스 유학길에서 급거 귀국, 약관 22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이후 1979년 10ㆍ26 사태로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5년여간 퍼스트레이디 대행은 계속된다.

박 후보는 10ㆍ26 이후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와중에 1980년 18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난다. 이후 성북동 자택 등에서 무려 18년간 사실상 칩거에 들어간다.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 기간에 그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거나 서적을 탐독하며 ‘훗날’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학교 이사장 등을 맡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박 후보는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2000년에는 총재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지만 2001년 상향식 공천, 당권ㆍ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 기간 북한을 방문,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 철도연결’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2002년 복당한 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등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4ㆍ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어냈다. 당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7년에는 첫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그러나 이후에도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이른바 ‘대세론’을 형성, 당내 친박(친박근혜)계의 정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과정에서 ‘판정승’을 거뒀고, 이후 다시 당을 장악한다.

그는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면서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2012년 4ㆍ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152석을 차지하는 대역전승을 거두며 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다만 여전히 5ㆍ16 쿠데타나 유신 등 과거사 문제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점이나 ‘불통 이미지’는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지적이 많다.

또 수도권과 중도층 그리고 20~40대 젊은 층에 취약하다는 점도 박 후보에게는 고민되는 대목이다.

▲문재인 후보 = 문 후보는 경남중ㆍ고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문 후보는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는 1978년 제대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79년 부마항쟁과 10ㆍ26, 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구속됐다. 2차 시험 합격소식을 들은 장소는 유치장이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후보는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좌절됐다. 변호사 길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였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업을 결정했다. 6월항쟁이 있던 1987년 5월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됐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을 맡을 정도로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후보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대선이 끝난 후 노 전 대통령은 문 후보를 붙잡았고 결국 문 후보는 청와대 생활의 시작과 끝을 노 전 대통령과 함께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참여정부 인사들을 향하던 검찰 비리수사의 칼끝이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하자 문 후보는 변호인 겸 대변인 역할을 하며 노 전 대통령을 방어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그는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장례 전반을 관장했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보선 국회의원 후보, 2010년 6ㆍ2 지방선거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한사코 현실정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문 후보의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작년 6월 자서전 ‘운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문 후보를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작년 말 ‘혁신과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참여해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했다. 또 지난 4ㆍ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나와 당선된 후 대선후보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정치개혁, 탈권위와 같은 공에도 불구하고 정권 말기 민심이반 속에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진보진영의 동반추락까지 초래한 것은 문 후보가 답해야할 숙제이자 대선 행보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친노의 수장’ 이미지를 극복하고 당내 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포용력을 발휘하는 것 역시 그의 앞에 놓인 시험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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