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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2)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2)

입력 2012-06-29 00:00
업데이트 2012-06-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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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으로 왕좌(王座) 오른 남인수(南仁樹)…인기와 돈과 염복 누리며 화려하게 살다간 일생

 김정구(金貞九)가 가수의 꿈을 안고「뉴코리아·레코드」사에 들어간 얼마 뒤 또 한 사람의 가수 지망생이「시애론·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다. 남인수(南仁樹)다. 가요 사상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다 간 남인수(南仁樹). 이난영(李蘭影)이 가요계 여왕이었다면 그녀와 함께 가요계 주류를 이뤄온 남인수(南仁樹)는 가위 가요계 황제였다. 그가 등장한 것은 193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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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남인수(南仁樹)는 17살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검정「쓰메에리」학생복에「게다」(일본 나막신)을(를) 신고 있었다.「시애론」의 문예부장 박영호(朴榮鎬)가 찾아온 그를「테스트」해 보고 가능성을 인정하여 작곡가 박시춘(朴是春)한테 소개, 이것이「데뷔」의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 첫 취입한 노래가 바로 남인수(南仁樹)의 대표곡『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 』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1절)

 그러나 당초의 이 노래는 제목, 가사가 달랐다. 가사는 <현해탄 푸른 물에 밤이 내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우는 저 배야>로 시작되는『눈물의 해협』이었다. 시인 김상화(金尙火)의 가사에 박시춘(朴是春)이 곡을 붙였다.

 처음 이『눈물의 해협』은 남인수(南仁樹)의 본명인 강문수(姜文秀)란 이름으로 취입했다. 그런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남인수(南仁樹) 자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초 기대를 걸었던 박시춘(朴是春)도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안가 남인수(南仁樹)는 전속사를 OK로 옮겨 버렸다. 여기서 처음 취입한 게 손목인(孫牧人) 작곡의『사랑도 싫더라 돈도 싫어』와『범벅서울』. 두 곡의 반응은 좋았으나「레코드」는「히트」하지 못했다.
 하루 3부제 데이트에 여자끼리 싸움도

 남인수(南仁樹)에 이어서 OK로 옮겨온 박시춘(朴是春)은 아무래도『눈물의 해협』이 아까왔(웠)던지 제목과 가사를 바꿔서 남인수(南仁樹)한테 다시 취입을 시켰다. 가사는 이부풍(李扶風)이 썼다. 이부풍(李扶風)은 본명이 박노홍(朴魯弘)으로『알뜰한 당신』『맹꽁이 타령』등「히트」곡의 가사를 쓴 사람이다. 똑같은 곡을 가사와 제목만 바꿔서 부른 것인데『애수의 소야곡』은「레코드」가 나오자마자「베스트·셀러」가 됐다.「시애론」을 실망시킨 노래가 OK로 옮겨와서 일약「달러·복스」가 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여건이 좋아야「히트」한다는, 지금도 내려오는 대중 가요계의 한「징크스」로 볼 수 있다. 사실상「레코드」가요의 황금기인 30년대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의 선전 방법을 썼다.

 「레코드」사가 신보를 내면 신문 잡지에 광고가 실리고 가수의「브로마이드」가 수만장씩 뿌려졌다. 하늘엔「애드벌룬」이 띄워지고 창경원의 벚꽃놀이 때는 신곡의 가사를 인쇄한 가사지(歌詞紙)가 꽃잎처럼 휘날렸다. 비행기를 이용해서 이 가사지와 공연 광고지를 살포한 예도 있다.「레코드」판매점에는「아치」가 세워지고 행인들한테 가사지를 나눠줬다. 가사지를 받아든 손님들은「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서 수백명이 노래를 합창하는 광경도 일어났다.(전수린(全壽麟)씨 말)

 이런「레코드」계의「붐」속에서 남인수(南仁樹)는 그 보다 먼저 나온 고복수(高福壽) 이난영(李蘭影) 이화자(李花子) 등과 함께 대중의 우상이 됐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천대하던 시대에서 불과 10여년. 그러나 30년대 가수는 딴따라가 아니라 가장 멋있고 돈 잘 쓰고 잘 노는 인기인이었다.

 까닭에 인기 가수일수록 염문이 많이 따랐다. 남인수(南仁樹)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는 저녁 시간이면 그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 무대 뒤로 몰려온 여성「팬」, 여관방까지 따라오는 아가씨들을 어떻게 안배, 처리하느냐로 고민해야 했다.

 오전, 오후, 저녁으로 3부제의「데이트」를 했는가 하면 시간 할당이 잘못되어 여자끼리 싸움판이 일어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가『꼬집힌 풋사랑』을 불렀을 때의 얘기.『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그 당시 유행하던 기생「엘레지」의 하나였다. 이 노래에 매혹된 산홍(山紅)이란 한 어린 기생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나머지 자살 미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남인수(南仁樹)가 병문안을 갔다.

 뜻밖에 남인수(南仁樹)를 만난 이 산홍(山紅)이란 기생은 그에게 순정을 바쳤고 그것을 보람삼아 삶을 이어갔다. 62년 6월 남인수(南仁樹)가 죽었을 때「산홍(山紅)」이란 이름으로 꽃다발이 그의 영전에 보내졌다. 남인수(南仁樹)와 그녀의 관계를 아는 연예인들은 평생 순정을 바꾸지 않은 한 숨은 여인의 꽃다발에 애틋한 정회를 느끼기도 했다.

 24살때부터 폐 앓고 「돈인수」란 별명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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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와 돈과 여자에 부족함이 없었던 남인수(南仁樹)에게도 어쩔 수 없는 불행은 있었다. 건강 문제였다. 그는 한창 청춘이 피어나는 24, 25세때부터 폐를 앓았다. 무대에 올라서면 9창 10창까지 터지는「앙코르」에 따라 노래의 강행군을 해야 했고 그러고 나면 각혈을 하고 몸져 누웠다. 무대에서 쓰러진 예도 한두번 아니다.

 그래도 건강이 다소 좋아지면 무대에 올랐다.

 그의 생활은 자연 병석과 무대의 교체. 병석에 누울 때를 대비해서 그는 번돈을 무척 아꼈는데 그 때문에 친구들은「돈인수」란 애칭을 주기도 했다.

 남인수(南仁樹)의「히트」는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38선이 그어지자 부른『가거라 38선』은 3천만의 애원을 그대로 대변했다, 그리고 휴전 뒤의『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를 청산한 환도열차의 합창곡이었다.

 그의 노래는 일제 때에 약 8백곡, 해방후 2백곡으로 1천곡을 헤아린다,

 그러나 역시 대표곡은 그의「데뷔」곡인『애수의 소야곡』이었던가?

 62년 6월30일, 45살로 숨진 그의 장례식(연예협회장)에서는 장송곡으로「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을 연주했다.

 <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3월 25일 제6권 12호 통권 제23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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