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에도 해방되지 못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해방 후에도 해방되지 못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입력 2015-06-24 17:18
업데이트 2015-06-24 17:18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해방 후 국내 돌아와서도 ‘위안부’와 혼동에 고통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 손해배상 승소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동원 근거는 1944년 8월 23일 공포된 ‘여자정신 근로령’이었다.

24일 광주고법 판결문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에 따르면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하자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했다.

태평양전쟁 후인 1942년에는 국민동원계획을 세우고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 등을 마련해 관 알선 형식의 노무동원계획을 실행했다.

태평양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1944년 8월에는 ‘반도인 노무자 이입에 관한 건’을 결의해 국민 징용령을 한반도에 적용했지만,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력이 부족하자 여자정신대를 조직하기로 한다.

한반도에서의 여성 근로정신대 동원은 ‘여자정신 근로령’ 시행 전부터 있었다가 1944년 이후 본격화한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나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모집이 이뤄졌다.

동원 대상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으로 중학교 정도의 학교 졸업자 또는 실력과 경험에 의해 광산·전기·전기통신 기술자 등으로 취업한 자로 한정했지만, 여자정신근로령에는 “지원자는 정신대원으로 할 것을 막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관의 개입, 신문광고·기사, 학교나 단체를 통해 지원을 빙자한 모집이 이뤄졌고 특히 국민학교 담임교사나 학교장의 강요와 설득이 많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은 배고픈 시절 배움에 목마른 소녀들을 충동했다.

근로정신대원들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名古屋) 항공기 제작소 도토구(道德) 공장, 도쿄(東京) 아사이토 방적 주식회사 누마즈(沼津) 공장 등 군수 공장에 동원됐다.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된 이들은 광주·전남 150여명, 충남 150여명인 것으로 시민모임은 파악하고 있다.

소녀들은 된장국이나 단무지 한 쪽이 전부인 식사에 일본인 작업반장의 감시를 받으며 비행기 페인트칠 등 중노동을 했다.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때는 전남 출신 6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속했던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다달이 적금을 해서 한꺼번에 지급하겠다”, “조선에 돌아가 있으면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모두 거짓이었다.

1945년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군 위안부 취급을 당했다.

강제동원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혼담이 깨지거나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는가 하면 환갑이 넘어서 이혼하는 사례도 있었다.

’정신대’는 곧 ‘위안부’라는 오인을 방치한 한국 사회 전체의 책임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큰 소리로 웃어본 적도 없었고, 맘 편히 큰 길 한번 다니지 못하고 골목길로만 다녔어요. 내가 무슨 도둑질이라도 했습니까? 죄라면 일본에 갔다 온 죄밖에는 없어요.” 한 근로정신대 할머니의 절규다.

1990년대 이후 일반군 위안부 문제가 조명받는 동안에도 근로정신대는 대중의 관심 밖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생연금 99엔’ 사건을 계기로 위안부와의 구별이 그나마 보편화했다.

99엔 사건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후생연금(국민연금) 탈퇴수당 지급을 요청하자 일본정부가 2009년 99엔을 지급한 것을 말한다.

광주고법 민사 2부(홍동기 부장판사)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원고 할머니들은 재판이 끝나자 만세를 불렀다.

이는 서울·부산고법에 이어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한 세번째 고법 판결이며 서울·부산에 이은 여자근로정신대 사건에 대한 사법부 최초의 배상판결이다.

연합뉴스
많이 본 뉴스
공무원 인기 시들해진 까닭은? 
한때 ‘신의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공무원의 인기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9급 공채 경쟁률은 21.8대1로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공무원 인기가 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은 임금
경직된 조직 문화
민원인 횡포
높은 업무 강도
미흡한 성과 보상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