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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서 무더기로 발견된 ‘한국인 軍위안부’ 일제 사료

中서 무더기로 발견된 ‘한국인 軍위안부’ 일제 사료

입력 2014-03-24 00:00
업데이트 2014-03-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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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기록보관소 6건 공개…”강제동원·조직행위 증거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 관동군의 근거지였던 중국 지린성 창춘(長春)시에서 한국인 군(軍)위안부에 대한 강제동원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제 시기 사료들이 다수 발견돼 공개됨에 따라 관련 연구가 탄력을 받을지 주목된다.

한국의 군위안부 연구자들은 “매우 중요한 문서로 일제의 치부가 숨겨져 있던 비밀창고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 군위안부 사료 25건 중 6건이 ‘조선위안부’ 관련 = 중국 지린성기록보관소(이하 기록보관소)가 지난 20일 연합뉴스를 포함해 일부 한국언론사에 공개한 군위안부 자료는 모두 25건이다. 기록보관소 측은 문건의 시기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 항목은 일본군이 군용공금과목을 할당해 위안부를 ‘구매’했다는 내용을 담은 ‘만주(국) 중앙은행의 전화통화기록’ 두 건이다.

통화내용을 수기로 풀어낸 이 사료는 일본군이 1944년 12월∼1945년 3월 네 번에 걸쳐 공용자금을 군위안부 항목에 지출했고 그 액수가 53만 2천 엔(당시 화폐단위)에 달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무잔이(穆占一) 부소장은 “처음으로 발견된 위안부 구매자금 문서”라고 말했다.

두 번째 항목은 일본군이 작성한 보고서로 1938년 2월 화중(華中)파견헌병대가 관동군사령부에 보고한 ‘난징헌병대 관할구역 치안회복 상황보고서’가 주를 이룬다.

’통첩’(通牒’ㆍ알림)이라는 문자가 찍힌 보고서에는 난징, 샤관, 쥐룽, 전쟝, 진탄, 창저우, 단양, 우후, 량궈 등 8개 시현에 배치된 일본군 규모, 위안부 수, 위안부 1명당 군인 비율, 열흘간 위안소를 이용한 군인 수 등이 기록돼 있다.

특히 우후 지역의 군위안부 109명 중에서는 ‘조선위안부’가 36명이었다는 내용도 나와 있다. 지역 전체 군위안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다.

1938년 2월28일 ‘난징헌병대 치안회복 상황보고서’에는 단양에서 2월 중순 위안부 수가 부족해 현지에서 위안부를 모집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무 부소장은 “알다시피 ‘모집’은 강제동원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 번째 항목은 모두 21건의 기록문서로 각 지방 헌병대가 상부에 보고한 ‘우정검열월보’(郵政檢閱月報), ‘군인범죄조사표’, ‘사상대책월보’ 등으로 기록보관소 측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유린하고 노예화하는 죄행이 기록돼 있다”고 강조했다.

’우정검열월보’ 제도는 중국을 침략해 만주국을 세운 일제가 군사기밀 등이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 군·민을 대상으로 벌인 편지·전보 검열제도로, 각 지역의 헌병부대가 검열결과 등을 정기적으로 작성해 관동군헌병대에 보고했다.

무 부소장은 “25개의 사료 중 4건이 (검열에 걸린) 일본군인 등의 편지”라며 “당시 일본군은 위안소, 위안부에 대한 내용도 공개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고 (관련 내용을 기록한) 이런 문서와 편지도 압수·폐기 등의 처리방식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 “’조선위안부 강제동원’ 사료 발견” = 기록보관소 측이 25건의 군위안부 사료 중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문서는 베이안(北安)지방검열부가 만든 ‘우정검열월보’(郵政檢閱月報)’에서 나온 한 일본인의 편지다.

헤이룽장 헤이허(黑河)에 사는 나카타라는 이름의 일본인이 일본 니가타현에 사는 무라카미에게 보낸 이 편지는 한 위안소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 군위안부들이 집단으로 국가총동원령에 의해 끌려왔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는 표현이 담겨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문서는 “육군관사 한구석에 위안소가 있는데 이 위안소는 소극장 안의 창고처럼 생겼다. 병사(兵舍) 사병들이 귀중한 정력을 배출하는 곳”, “위안소 병력(兵力)은 단지 20명 정도며 전부 ‘선인’(鮮人·조선인)으로 국가총동원법에 묶여 온 것”, “방자(芳子), 화자(花子) 등에게 분홍색 배급권이 지급됐다”, “봉급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배급권도 직권남용으로…장교들 전용상태”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문서는 모두 옛 일본어로 작성된 상태여서 일본어에 능통한 통역사도 단어, 띄어쓰기 등에서 헷갈리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기록보관소의 자오위제(趙玉潔) 연구위원은 ‘위안소 병력 20명’에 대해 ‘위안소 내의 위안부 20명’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체 내용과 ‘국가총동원법의 의해 끌려온’이라는 표현 뒤에 일본어식 여자이름이 나온 점 등을 종합해 내린 판단이라는 것이다.

자오 연구위원은 “이런 표현이 담긴 문건을 본 건 나도 처음으로 매우 놀랐다”며 다만 “편지를 쓴 사람이 군인인지 일반인 인지는 문건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도 24일 “다른 연구원과 함께 문서를 검토한 결과, ‘병력’은 ‘위안부’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식 이름인 하나꼬(화자) 등의 이름을 붙인 배급표를 나눠주었다는 의미로 보인다”며 “위안부 할머니들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문서 후반부분은) (사병들이) 낮은 월급으로는 이용할 수 없었고, 그나마 직권남용으로 장교들이 전용하고 있다는 점을 쓴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한국인 위안부 관련 사료에서는 ‘조선인위안부’를 ‘특수위안부’로 표기한 구절도 발견됐다.

이 교수는 일반적으로 군 위안부는 성노예 피해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빨래나 식사 등을 해주는 등의 다양한 형태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며 ‘특수위안부’는 이른바 성노예 피해자를 따로 지칭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 “매우 중요한 문서”…한중연구 탄력 전망 = 기록보관소는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 대해 “일본이 중국침략 시기 스스로 만는 것으로 (일제 만행을 뒷받침하는) 진실성, 권위성을 갖췄다”며 기존 위안부 자료와는 무게감이 다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학계에 따르면 실제로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만든 군위안부 자료는 일제가 패망 직전 조직적으로 폐기해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서 핵심쟁점이 되는 ‘강제동원’ 여부에 관한 일제문서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오 연구위원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뒷받침하는 문건이 출현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며 “당시 일본인이 편지에서 조선위안부 20명이 국가총동원법에 묶여 온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법에 의한 일종의 ‘강제징집’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은 1938년 4월 1일 제정돼 수차례 수정을 거쳤지만, 핵심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한 조항은 ‘일본정부는 전쟁 시 국가동원 상황에서 필요시 법에 따라 제국 신민을 징용해 종사하게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린성기록보관소는 관동군헌병대의 사료 5만 권을 포함해 옛 만주국의 65개 군과 정부기관이 남긴 10만 권의 기록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며 “정리·공개된 사료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료 공개를 계기로 한중 공동연구가 탄력을 받을지도 주목된다.

우리 정부는 지난 1월 일본이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담은 일본 중·고교 교과서 제작지침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다른 나라와 함께 일제 침탈만행을 고발하는 국제연구를 추진키로 했으며 중국이 “지지한다”며 동조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달에는 한·중·일 학자들이 상하이(上海)사범대학에서 학술회의를 열고 일본군 위안부 연구 성과 발표와 문제 해결을 위안 방안을 논의했다.

한국정부는 이미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에 이들 문서를 열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으며 중국도 이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학계도 조만간 자료조사팀을 구성해 위안부 사료 분석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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